
“아홉째 해 열째 달 열째 날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겔 24:1)
에스겔은 매일같이 날짜를 세어 보며 살았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말씀이 자신에게 임했던 시점의 날짜를 매번 정확하게 기록합니다. 이것이 에스겔서 기록의 특징입니다.
에스겔은 지금 세계 최강대국 바벨론의 포로입니다. 당연히 그 땅에는 바벨론의 달력이 있었고, 제국의 위엄을 드러내는 그들만의 연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은 의도적으로 바벨론의 달력과 연호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는 꾸준히 ‘우리가 사로잡혀 온 지’ 얼마가 되었는지를 기록합니다.
날짜를 세는 데는 반드시 기준점, 즉 ‘기점(起點)’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어느 시점을 기준점으로 삼고 있느냐는 그가 누구이며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기점은 단순한 시점이 아니라 역사관이며 세계관이자 정체성입니다. 대한제국은 국호의 공언과 동시에 연호를 제정했습니다. 그것은 자주독립 국가로서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에스겔은 바벨론 왕이 다스리는 땅에 살면서 ‘느부갓네살 왕의 통치 햇수’를 기준 삼지 않았습니다. 그는 느부갓네살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을 살았습니다. 두 발을 그발 강가에 딛은 채 그는 매일같이 하나님의 시간을 헤아렸습니다. 비록 ‘사로잡혀 온 날’은 비극적인 날이지만 고난과 아픔의 시간조차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고백이 그의 날짜 계산법 속에 녹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 이것은 모세의 고백입니다. 지혜로운 마음은 단순히 시간에 떠밀려 달력을 넘기는 삶을 거부합니다. 내 인생을 어떤 시간의 단위로 헤아리고 있는지, 어떤 시점을 기준 삼아 시간표를 그려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리스도인 모두에게는 공통된 연호가 있습니다. A.D.입니다. 대다수의 사람이 관용적으로 사용하는 이 표시는 Anno Domini, 주님의 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바벨론과도 같은 세상 한복판에서 주님의 해(Anno Domini)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인생이 계획대로 되든, 혹은 틀어지든 그 모든 시간을 하나님의 통치라는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특별한 복입니다.
출근, 회의, 업무, 영업, 공부, 약속, 육아 등으로 현대인의 하루는 무척이나 바쁩니다. 세상의 달력과 스케줄에 맞춰 분주하게 살다 보면 우리는 그저 시간에 쫓기는 존재가 되기 쉽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시간, ‘카이로스’를 헤아려 보기 위한 잠깐의 멈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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