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오늘의 시] ‘시인의 사치’ 박노해

이 빌어먹을 시인의 가난/ 이 얼어죽을 시인의 사치/ 나는 책과 문구를 가슴에 안고 / 소년처럼 명랑한 얼굴로 걸어 나선다

서촌 골목길을 걷다가  
단아한 간판이 예뻐서 들어갔더니
어머나, 이건 딱 내 취향
질 좋은 공책이랑 수첩과 펜
1800년대의 디자인 좋은 책들과
세계의 잡지들과 은은한 향초가
시간을 거슬러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서른 중반의 주인에게
세계 구석구석에 숨은 귀한 작품들을
데려와주어 감사해요, 인사를 건네고서
1870년대에 만들어진 벽돌 두께의
자그만 식물 사전 한 권과
소문만 들었던 그 잡지 창간호와
공책과 수첩을 품에 안아버렸다 

아, 이번 달 난 또 과소비다
그녀가 내어준 쿠키와 홍차를 음미하며
나는 텅 빈 지갑을 위로하듯 속삭였다
흔히 과소비란 남들 보란 듯이 쓰는 돈이지,
하지만 어떤 과소비는 최고의 잉태이지,
나는 이 작고 두꺼운 벽돌 책을 안고
두근두근 황홀한 미소를 짓는다 

그래, 스크린에 무수한 영상과 글이 명멸해도
좋은 책은 하나의 위대한 건축이지
난 150년 전의 이 책을 씹어 삼켜
그보다 오래갈 한 권의 책을 쓰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래의 네가 순례할
감동의 건축인 책을 펴내고 말 테다 

울적울적 텅 빈 내 지갑
이 빌어먹을 시인의 가난
이 얼어죽을 시인의 사치
나는 책과 문구를 가슴에 안고  
소년처럼 명랑한 얼굴로 걸어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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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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