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우구스티누스‧루소‧톨스토이의 <고백록>을 ‘3대 참회록’이라고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그의 삶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웠던 죄의 행실을 낱낱이 밝히고 있다. 그리고 <고백록> 제11편에서 시간에 대해 깊은 철학적‧신학적 성찰을 펼친다.
그 이전에는 시간이 인간 외부에 존재한다는 ‘객관적 시간론’이 지배적이었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이 ‘과거의 기억‧현재의 직관‧미래의 기대’라는 인간 내부의 정신작용으로 존재한다고 보았다. 서양철학 최초의 ‘주관적 시간론’이다. 그의 고백록은 지난날 죄악의 기억을 앞날의 거듭나는 기대로 이끄는 현재의 결단이었던가 보다.

‘가장 완벽한 소설’이라는 <안나 카레리나>의 작가 톨스토이는 말년에 쓴 <참회록>에서 절도, 성병, 폭행, 결투와 살인 등 믿기 어려울 만큼 난잡했던 지난날의 타락과 방종을 정직하게 털어놓는다. 세상을 향한 고백이 아니다. 신을 향한 회심(回心)의 고백이다.
루소는 <참회록>에서 소설가와 철학자로 이름을 날리던 자신이 어떻게 방탕한 세월을 보내다가 비난과 멸시의 대상이 되었는지 솔직하게 밝히고 있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참회록을 ‘허영에 미혹된 과장된 고백’이라고 비난했다. ‘위악(僞惡)을 가장한 위선(僞善)’이라는 뜻 아닐까?

여기, 아우구스티누스‧루소‧톨스토이의 3대 참회록보다 더 깊은 성찰을 품은 참회록이 있다. 다윗‧욥‧사도바울의 고백, ‘성서의 3대 참회록’이다. “주의 인자하심으로 내 죄를 지워주소서.”(시편 51:1) 권력을 움켜쥔 왕이 아니라 무력한 죄인으로 무릎 꿇은 다윗의 참회, 영혼 깊은 자리에서 솟구쳐오르는 절규다.
그는 왕권을 악용해 충성스러운 장군의 아내를 범하고, 그 악행을 덮으려고 충신을 전쟁터에 내보내 죽음에 이르게 하는 크나큰 범죄를 저질렀다. 다윗의 위대함은 죄를 짓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다. 죄와 악행으로 무너진 자리에서 하나님께 죄를 자복하고, 그 죄를 참회의 글로 세상에 스스로 드러냈다는 사실에 있다. “내가 죄악 중에 태어났다.” 도덕적 반성이 아니다. 존재의 밑바닥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영혼의 절규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구약성서의 <욥기>처럼 신과 악마의 대화로 시작한다. 욥은 ‘흠 없고 정직하며 악을 멀리하는 의인’이었지만, 그는 뜻밖의 시련을 맞는다. 재산을 잃고, 자녀를 잃고, 건강까지 잃는다. 아내마저 그를 저주하며 떠난다. 그래도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그 고난이 죄악 때문이라는 친구들의 질책을 반박하며 억울함을 주장힌다.
그렇지만 혹독한 시련이 끝모르게 이어지자 그는 마침내 하나님께 항의한다. “내가 범죄했다 한들 주께 무슨 해로움이 있겠습니까? 어찌하여 나를 주의 과녁으로 삼고, 주의 무거운 짐이 되게 하십니까?”

하나님은 욥의 항의에 직접 대답하지 않는다. 그 대신 폭풍 가운데서 우주와 자연의 질서를 밝히며, 욥이 이해할 수 없는 창조의 깊은 섭리를 드러낸다. 그 앞에서 인간의 한계와 무지(無知)를 깨달은 욥은 땅에 엎드린다. 그는 이제 자신의 고통에 집착하지 않는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으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니다. 내가 스스로 한탄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합니다.”
욥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겸손히 받아들인다. 하나님을 믿고 계명을 따르고 복을 비는 종교의 자리를 떠나, 하나님을 만나 그 초월적 섭리 앞에 겸손히 엎드리는 신앙의 자리를 편다. ‘믿는 종교’가 ‘만남의 신앙’으로 거듭난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였고, 교회를 핍박한 자였다.” 유대교 율법에 정통했던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선 열정적 바리새인이었다. 그러나 부활한 그리스도를 만난 순간, 그 믿음과 열정은 산산히 부서졌다. 그의 종교적 열정은 오히려 진리를 거스르는 무지와 오만의 죄악이라는 자각이 영혼 깊숙이 파고들었다.

사도 바울의 참회는 단순한 반성이 아니다. 삶의 발길을 돌이키고 인생의 목적을 송두리째 뒤집는 방향의 전환이었다. 이제까지 그를 지배하고 있던 율법의 족쇄를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전 존재를 내맡기는 실존적 결단이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한 번의 회개가 아니라, 날마다 죽고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거듭남이었다.
욥의 참회는 괴테에게 문학이 되었고, 다윗의 참회는 성서의 시편이 되었으며, 바울의 참회는 신앙의 복음이 되었다. 참회는 후회의 감정도, 뉘우치는 눈물도, 종교적 미덕도 아니다. 용암처럼 치솟는 진실의 분출이다. 참회는 죄의 고백에 그치지 않는다. “정결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편 51:10) 지난날의 뉘우침만이 아니라, 앞날의 새로움을 간구하는 소망이 절실하다.
우리는 다윗처럼 욕망에 눈멀지 않았던가, 욥처럼 자기 의(義)로 우쭐대지 않았던가? 바울처럼 종교적 열정으로 자만하지 않았던가? 저들의 참회는 지금 우리 앞에 진실의 거울로 서 있다. 저들의 고백은 오늘 우리 삶에 거듭남의 길을 활짝 열어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