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에 바란다] 링컨의 리더십, 박정희의 사람 보는 안목, 노무현의 대인배적 인품을…

#1
9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계모로부터 홈스쿨링을 받았다. 독학으로 1837년 변호사가 되었다. 일리노이주 하원의원을 거쳐 1847년 연방하원의원에 당선되었으나 미국-멕시코 전쟁을 반대하다 연임에 실패한다. 1958년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에 출마했으나 또 낙선한다.
1860년 대통령 선거에서 산업자본가 세력의 지원에 힘입어 어렵게 당선된다. 취임하기도 전에 남북전쟁이 발발한다. 노예해방 시책에 대한 반발이었다. 이 전쟁으로 62만 명이 숨진다. 그럼에도 그에 의해 노예해방은 실현된다.
헌법에 노예제 폐지 조항을 넣어야 했다. 수정 의결 정족수에 20표가 부족했다. 소통과 설득의 리더십을 발휘해 극렬한 반대 자세를 취하고 있던 야당을 끌어들여 끝내 통과시켰다. 비록 두 달 뒤 암살자의 총탄에 유명을 달리했지만 그의 바다 같은 포용력과 용광로 같은 열정은 에이브러햄 링컨을 가장 위대한 미국 대통령 반열에 올려놓았다.
#2
1969년 10월 21일 서울 화곡동. 미국 교환교수를 끝내고 집 수리를 하고 있던 남덕우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개각 뉴스를 듣고 화들짝 놀랐다. 임명된 재무 장관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부랴부랴 청와대로 들어온 남 교수에게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건넨 첫마디. “남 교수, 그동안 정부가 하는 일에 사사건건 비판을 많이 했는데, 이제 맛 좀 봐!” 였다. 남 교수는 5년간 재무 장관으로 있다가, 74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79년 청와대 경제 담당 특보 등 10년 동안 박 대통령의 경제 참모로 일했다.
#3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선 예비후보 경선 과정. 노무현 예비후보와 최초의 개방직 국립극장장 김명곤이 서울 시내 허름한 일식집에서 만났다. 문화예술에 대한 과외공부와 예술인들의 지지 유도를 위해 마련한 그 자리엔 권양숙 여사도 동석했다.
술잔이 몇 순배 오고 가던 중 노 후보가 말했다. “예술도 경쟁력이 있어야 합니다. 언제까지 지원만 바랄 겁니까?”
이 말을 들은 김명곤은 분기탱천했다. “일국의 대통령을 하시겠다는 분의 문화예술에 대한 식견이 그토록 천박하다니 정말 실망입니다.” 두 사람은 각기 붉으락푸르락하면서 서둘러 판을 접었다.
2006년 2월 국립극장장 직을 끝내고 연극인으로 대학로에 돌아온 김명곤에게 청와대로부터 전갈이 왔다.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 후임으로 일해 달라는.
#4
1967년 전남 고흥군 소록도. 당시 ‘영부인’이었던 육영수 여사가 한센인들을 만났다. 육 여사는 고름이 줄줄 흐르는 주민들의 손을 어루만지며 그들의 민원을 진지하게 청취했다. 이후 1970년에도 재차 소록도를 방문해 그들을 따스하게 안아 주었을 뿐 아니라 당시로서는 거액인 2,000만 원을 들여 진료실과 목욕탕 등을 건립하게 했다. 잘 알려진 대로 준공식을 앞둔 1974년 8월 15일 문세광 총탄에 서거함으로써 끝내 소록도에 다시 가진 못했다.
#5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국민의 지지를 한 몸에 받으면서 새로이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뽑혔다. 소년공 출신 흙수저에 간난신고(艱難辛苦)를 겪은 입지전적 인물답게 풍기는 카리스마가 장난 아니고 그만큼 주위의 기대도 크다.
중요한 것은 이재명 대통령이 링컨의 리더십, 박정희의 사람 보는 안목, 노무현의 대인배적 인품을 갖췄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것이야말로 오랜 세월 갈라치기와 엉뚱한 비상계엄 조치로 폐허가 된 대한민국을 살리는 첩경일 것이다.
대통령 부인의 처신 역시 대통령의 통치 실력만큼 중요한 요소다. 육 여사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법인 카드 관리 잘하고 조신한 자세로 민초 사이로 파고 들어가 그들의 아픈 곳을 감싸는 영부인이 될 것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