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회개의 핵심

사무엘하 15장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삼하 15:26)
용서를 구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이 공존합니다. ‘용서받기를 바라는 기대’와 ‘용서받지 못할까 두려운 불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용서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더 크게, 더 감정적으로 사과하려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애쓴다고 해서, 용서를 요구할 자격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용서를 구하는 것과 용서를 강요하는 것은 다릅니다. 진정한 사과는 상대의 용서를 구하는 것이지 상대에게 용서를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잘못을 더 깊이 인정하고 더 크게 뉘우치면, 상대는 나를 당연히 용서해야 할까요? 용서는 전적으로 용서를 베푸는 쪽의 권한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사과나 뉘우침을 용서의 충분조건처럼 여기는 것 같습니다. 충분한 사과와 뉘우침에도 불구하고 내가 기대했던 용서가 베풀어지지 않으면 도리어 분노와 원망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미안하다고 했잖아!” 과연 그 사과가 진심이었을까요? 사과의 형식은 갖추었는지 모르지만, 그 내용은 오히려 거래에 가까웠을 수 있습니다. 일정 비용을 지불하면 물건을 소유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사과를 비용처럼 지불하고 용서를 소유하려 하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나의 회개 기도는 어떠한지 돌아보게 됩니다. 만약 회개를 했는데,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용서받지 못할 가능성이 있어도 나는 내 죄를 정직하게 고백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다윗은 “내가 뉘우치고 있으니 나를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소서”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남은 평생을 아들을 피해 도망자로 살다가 생을 마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렇게 살겠다고 고백합니다.
용서라는 결과를 보장받으려 하지 않는 마음, 이것이 바로 회개가 진짜라는 증거 아닐까요? 회개는 뉘우침을 조건으로 삼은 자기 방어가 아닙니다. 자기 부인이야말로 진정한 회개입니다. 다윗은 진심으로 남은 인생을 도망다니다가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의 용서는 당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적인 은혜였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은혜로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어쩌면 회개조차도 거래처럼 여기기 때문은 아닐까요? 무언가를 얻기 위한 조건처럼 회개한다면, 그런 마음에는 은혜가 머물 자리가 없습니다. 은혜는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고, 회개는 그 자격 없음을 고백하는 자리입니다.
잠깐묵상 오디오듣기
https://youtu.be/i2t41wsbp6E?si=Z8gjpGjcZxhDwwT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