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태형, 왜 40대를 넘지 말라고 했을까?

신명기 25장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매를 지나치게 때리면 네가 네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 하노라”(신명기 25:3)
죄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죄의 심각성을 분명히 경고하며, 그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죄를 심판하는 인간의 태도에 대해서도 경계합니다. 죄를 벌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해서, 형벌 자체가 곧 정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형벌은 죄에 대한 응당한 대가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실존적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같은 인간을 죄인으로 확정하고, 인간이 인간에게 벌을 내리기도 하며, 인간이 인간에 의해서 벌을 받기도 합니다. 심지어 인간이 인간의 생과 사를 결정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형벌입니다.
이러한 자격과 권한은 도대체 누가 부여하는 것일까요? 서로가 합의한 것입니다. 최악을 심판하기 위해서 불가피한 차악을 허용하는 것에 사회 구성원들이 동의한 것입니다. 형벌을 집행할 때 까다롭고 신중한 절차를 거치는 것은 형벌의 차악성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신명기 25장 1-3절은 태형을 다룹니다.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을 때, 재판을 통해 어느 한쪽의 죄가 확정되면 죄인을 40대까지 때릴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양형에 상한선을 둔 것입니다. 왜일까요? 그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명시합니다. “만일 그것을 넘겨 매를 지나치게 때리면 네가 네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 하노라.”
잘못을 해서 맞아도 싸지만, 여전히 그는 형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갈등 상황에서 가장 잊어버리기 쉬운 것 아닐까요? 갈등이 심화되고 싸움이 과열되면, 우리는 서로의 정체성에 대해 너무 쉽게 잊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가 누구든 그냥 나쁜 놈이 되고 맙니다. 나쁜 놈으로 만들고 맙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 사이에도 늘 시비거리가 생긴다는 것을 하나님은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싸우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시비를 가지지 말고 무조건 덮으라고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재판을 해서 잘못을 가리는 것을 허용하십니다. 그러나 “그도 네 형제임을 잊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이기에 살다 보면 정죄와 판단이 불가피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도 네 형제다.” 이것이 선입니다. 우리는 이 선을 지키며 진노 중에도 긍휼을 잊지 않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잠깐묵상 오디오듣기⬇)
https://youtu.be/QMkRbeT1j9c?si=iBgCWGYIs0yzyVI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