얽히고설킨 실타래를 어찌 풀지 난감할 때 방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뉠 것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실마리 찾아 한사코 풀어내는 일이 가장 대견할 터이다.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판단, 급한 마음 못 이기며 가위질하거나 쓸 만한 부분만 골라내는 방법도 있으리라. 굳이 그걸 풀 이유가 어디 있냐며 고스란히 내버려 두는 길도 있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은 꼭 써야만 하고 새로 살 형편도 안 된다면 문제는 간단치 않다. 하는 수 없이 앞의 두 방법 놓고 좀 더 고민할 수밖에 없다는 데 머리는 아파진다. 풀긴 풀되 어찌 풀 것인가? 절박하면 절박할수록 상황을 인식하는 이들의 시각도 다를 수밖에 없으리라. 그리고 어느 한 쪽을 선택하든 후회와 반성 역시 때늦은 일임을 알게 될 것이다.
한국정치를 꼬여있는 실타래에 비유한다면, 그리고 ‘꼬여 있음’을 ‘문제’로 인식하여 이를 풀어야 한다면 해법 역시 위의 상식적 사고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 정치가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형편없이 꾸겨지고 얼룩진 오늘의 모습을 ‘문제’라고만 인식, 분노할 뿐 어떤 행동도 도모하지 못하면서 이따금 돌아오는 선거나 치르며 눈 흘기면 문제는 해결되는 걸까?
어떤 이들은 한국정치의 ‘꼬여있음’이 직업정치인들 자신의 업보라고 치부해 버린다. 그래서 해결 주체는 이를 쳐다보는 ‘우리’일 수 없고 문제를 저지른 ‘그들’의 일이라 탓하기도 한다. 꼬인 실타래를 끝까지 같이 풀거나 가위로 잘라낼 필요조차 없이 그냥 방치해 두는 게 옳다는 판단이다. 소극적 참여보다 적극적 불참과 정치적 무관심이 낫다는 이들의 판단은 오늘의 한국정치를 밤하늘의 별이나 소가 닭 보듯 만들었는지 모른다. 정치적 무관심의 씨앗이 소리 없는 환멸과 극단적 실망의 싹을 틔워 오늘의 불신초(不信草)도 콩 나무 줄기처럼 자라났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인식의 세계에선 자유로울망정, 결과와 책임의 세계에서마저 여유로울 수 없다. 특히 무관심의 약점을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경우, 더욱 더 그 자유의 한계를 절감하게 되는 공간이 바로 이 땅이다. 한국정치를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고 해석하든 이제껏 ‘대입?적용’한 숱한 이론들은 주로 바다 건너 성공적 현상을 보고 만든 것들이었다. 이론뿐 아니라 저들의 정치사상적 고민과 흔적을 통해 우리의 정치현실을 ‘치유·측정’하려 함도 무리였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된다.
어느 이론이나 사상체계를 통하더라도 흔쾌히 풀리지 않는 우리 정치의 ‘꼬임’은 그렇다면 무엇으로 어떻게 풀 것인가 ? 이론이나 사상이란 것들이 그대로 지탱해야 할 필요성 뒤에는 고상하거나 거룩한 언어들로만 묘사할 수 없는 또 다른 현실이 역사로 되살아나게 마련이다. 더 이상 우아(優雅)한 언어로만 말할 수 없는 부분은 어디부터인가? 그리고 그건 어디까지일까 ? 게다가 의외로 간단히 풀릴 꼬임의 매듭 또한 어딘가 따로 있으려나?
한국정치는 정치계파가 결정한다. 정치계파는 누구도 공략할 수 없는 이 나라의 굳건한 지배세력이며 정치발전과 아무 관련이 없다. 계파를 이어가는 여러 젖줄과 생명연장수단은 유권자들이 생각하고 바라는 정치 이미지와 전혀 관계가 없다. 계파의 경계선을 쉴 사이 없이 녹이며 그들끼리 끝없이 변신하고 변명해도 용서되는 땅 또한 바로 ‘여기’다. 계파 간 배신과 복수는 이들 정치적 무리를 끝없이 해체시키면서 한국정치사의 그늘진 계곡을 파놓는다. 의리도 믿음도, 진지함이나 고뇌 따윈 끼어들 틈조차 용납되지 않는 계파 표류의 행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믿음 아래 이 시리즈를 시작한다.
‘계파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는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적과 동지가 확실히 나뉜다는 사실은 어느 쪽 말과 행동이 옳고 또 누굴 지지해야 할 지 판단하는 데 건전한 긴장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어차피 바람직한 현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번 몸담은 계파를 미련 없이 떠나며 보스를 배반하고 게다가 떠나버린 부하의 행적을 뒤쫓아 끝내 복수의 칼날을 휘두르는 우두머리의 행동은 도무지 뭘 말하는 걸까. 이는 풀어야 할 매듭의 한 꼭지로 남는다. 계파 간 쉼 없는 이합과 집산, 그리고 그 여전한 표류의 역사 주변에서 여전히 새어나오는 ‘가증스러움’은 무엇을 뜻할까?
이 나라 정치계파들이 저지른 행각은 고상한 언어나 지당한 논리로 정리할 수 없다. 그럴 수 없는 이유보다 그래야 할 필요를 더 조리 있게 변명해야 할 판이다. ‘있었던 일들’과 ‘있는 일들’을 다시 정리하고 이를 토대로 ‘있게 될 일들’을 가늠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과거의 행각들을 역사적으로 재추적함으로써 다가오는 시간들 속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이러한 작업이 의지와 끈기를 필요로 하는지, 아니면 칼과 가위를 요구하는지는 여전한 과제로 남는다. 다만 꼬인 실타래를 그냥 쳐다만 볼 수 없다는 생각이 필자를?지탱해준 힘이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이 같은 작업이 표피적 감상주의의 발로라거나 역사적 상식의 재구성이란 역비판도 문제 삼을 필요는 없으리라. 보다 중요한 건 너무나 쉽게 잊고 또다시 분노하는 이 나라 유권자들의 두 얼굴뿐 아니라 이제까지의 계파정치를 누구도 종합하려 들지 않았다는 학문적 무관심에 있다.
이 글은 기존의 정치연구문헌들이 취하는 전문적 구성방법을 탈피한다. 정밀한 이론이나 고도로 세련된 개념 틀로 지난 역사를 미시적으로 훑거나 또 다시 무슨 거대 담론의 출현을 기약하며 긴 호흡을 준비하려는 건 더더욱 아니다. 가장 좋은 작업의 변명 근거로는 그간의 상대적 무관심을 꼽을 뿐이다. 알고는 있으나 확실히 정리되지 않은 과거 계파들의 행적. 기억할 수는 있으나 누가 어디서 어디로 떠나갔는지 굳이 헤아릴 순 없는 정치무리들의 표류사(漂流史). 그 ‘어지러움’의 정돈과 ‘헛갈림’의 체계적 축적. 그것이 이 시리즈의 목적이다.
계파는 지금도 암약(暗躍) 중이다. 자기 이익의 극대화와 권력 쟁취의 속내 감추는 저들의 이동이 늘 ‘현재진행형’ 시제를 취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행여 자기계파의 패배와 지체를 용납할 수 없다는 정치적 긴장의 항구성 때문이다. 그것이 ‘어른’의 뜻이요, 말 못할 보스의 눈빛이라면 ‘졸개’들이 마다할 까닭은 어디에도 없었던 셈이다. 하지만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면 배반과 변절은 기꺼이 허용되고 복수와 설욕 또한 얼마든지 변명할 빈터 마련하는 재주의 기발함도 이 나라 계파들에겐 비일비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