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조 민주화와 임금인상 요구서 갈등 시작…경찰의 노동운동 사찰과 지프차 돌진이 항쟁의 도화선으로
1980년 4월 강원도 정선군 사북에서 발생한 사북항쟁은 오랫동안 과격한 노동분규로 알려졌다. 그러나 경찰 지프차 돌진으로 촉발된 항쟁과 노사정 합의 이후 이어진 연행·고문 등 국가폭력의 실상이 드러나면서 역사적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2026년 8월 대통령의 공식 사과에 이어 10월 21일 제46주년 기념식에서 처음으로 대통령 기념사가 전달될 예정이다. 아시아엔은 정선지역사회연구소가 발간한 『사북항쟁 일문일답』과 관련 기록을 바탕으로 사건의 발단과 전개,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삶, 진실규명과 화해의 과제를 5회에 걸쳐 살펴본다. 자료집의 해석과 공식 조사에서 확인된 사실은 구분해 전한다. <편집자>
1980년 4월 21일,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동원탄좌 사북광업소에서 광부들이 집단행동에 나섰다. 이들의 요구는 노동조합 운영의 민주화와 임금인상, 열악한 노동조건의 개선이었다. 그러나 광부들의 항의는 나흘간 사북 시내에서 이어진 대규모 항쟁으로 번졌다. 경찰과의 충돌로 사상자가 발생했고, 계엄군 투입까지 준비됐다. 극적인 노사정 합의로 사태가 수습됐지만 이후 수많은 광부와 주민이 연행되고 고문을 당했다.
사북항쟁은 왜 발생했을까. 단순히 임금을 더 받기 위한 노동쟁의였을까. 아니면 노동현장에 깊숙이 개입했던 국가권력과 광부들의 충돌이었을까. 정선지역사회연구소가 제46주년 사북항쟁 기념식에 맞춰 발간한 『사북항쟁 일문일답』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당시 노동환경과 노동조합의 갈등, 경찰의 사찰 활동, 항쟁 이후 국가폭력까지 함께 살펴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당시 석탄은 한국 경제를 움직이는 중요한 에너지원이었다. 탄광에서 캐낸 석탄은 가정의 난방과 산업현장의 동력으로 사용됐다. 광부들은 나라의 경제성장을 뒷받침하는 노동자였지만 작업환경은 위험했고 생활 여건도 열악했다.
1979년 4월 동원탄좌 노조지부장 선거에서는 이재기가 이원갑을 근소한 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됐다. 그러나 선거인 자격 문제가 제기돼 상급 노동조합이 선거 무효를 결정했고, 노조는 지부장 직무대리 체제로 운영됐다. 노조 내부의 갈등은 이듬해 임금협상 과정에서 더욱 커졌다. 전국광산노조가 42.75%의 임금인상 요구안을 의결했으나, 동원탄좌 노조지부는 회사 측과 20% 인상에 합의했다. 광부들은 임금인상 폭뿐 아니라 조합원들의 의사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은 결정 과정에도 반발했다.
1980년 4월 16일 조합원 25명이 서울의 광산노조위원장실을 점거해 임금협상과 노조지부장 선거 문제를 제기했다. 이후 사북 현지에서도 조합원들의 항의가 이어졌다. 4월 18일에는 광부 수백 명이 사북지서 앞에 모였다. 이들은 노조지부장 재선거와 임시대의원대회 개최를 요구했다. 경찰과 노조 관계자들의 약속에 따라 일단 해산했지만 갈등은 해소되지 않았다.
4월 21일 임시대의원대회가 예정돼 있었으나 계엄당국은 집회를 허가하지 않았다. 노조사무실에는 광부들이 모였고 경찰은 이들의 동향을 감시했다. 결정적인 사건은 이날 오후 발생했다.

자료집에 따르면 농성 현장에서 사진을 촬영하던 사복 경찰관이 광부들에게 발각됐고, 도주하는 과정에서 경찰 지프차가 앞을 가로막던 광부들을 들이받았다. 원일오 씨 등 여러 광부가 부상했고, 원씨는 중상을 입었다. 동료가 경찰 차량에 치여 쓰러지는 모습을 본 광부들은 격분했다. 경찰이 광부를 죽였다는 소문이 퍼졌고, 사북지서와 광업소 주변으로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이때부터 갈등의 성격이 달라졌다. 노조 민주화와 임금인상을 요구하던 광부들이 경찰을 비롯한 공권력과 직접 대치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탄광은 민간기업이 운영했지만 국가의 에너지 정책과 산업 통제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광산 노동운동 역시 경찰과 정보기관의 감시 대상이었다.
황인욱 정선지역사회연구소장은 자료집에서 이런 구조가 사북항쟁의 성격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라고 설명한다. 광부들이 왜 기업주만이 아니라 경찰과 계엄당국을 상대로 대규모 항쟁을 벌였는지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사북항쟁의 역사를 돌아볼 때 광부들의 집단행동과 그 과정에서 발생한 폭력도 함께 다뤄야 한다. 항쟁 과정에서 경찰관이 사망했고, 노조지부장의 가족도 폭행 피해를 입었다. 이 역시 사건의 일부다. 그러나 이러한 피해만으로 항쟁의 발단과 이후 국가가 저지른 인권침해를 설명할 수는 없다. 4월 21일 이전에 누적된 노동현장의 갈등과 그날 발생한 경찰 차량 돌진 사건을 함께 살펴봐야 사건의 전모에 가까워질 수 있다.
46년이 지난 오늘 사북항쟁의 출발점을 다시 묻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광부들은 단지 임금을 더 받기 위해 일어선 것인가. 아니면 자신들의 노동과 존엄이 존중받지 못하는 현실에 항의한 것인가.
사북항쟁은 노동조합의 민주적 운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공권력의 개입이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로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