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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기행 ②] 변문에서 요동벌판까지…연암의 ‘목수심교’와 끝내 만나지 못한 호곡장

조선 후기 제작된 「연행도(燕行圖)」 계열 지도. 압록강을 건너 책문(변문)을 거쳐 요동과 북경으로 향하던 조선 사행단의 연행로와 주요 지명이 표시돼 있다.

1. 프롤로그

박지원이 압록강을 건넌 날은 양력으로 1780년 7월 25일이었다. 연암의 『열하일기』에는 그 날짜 표기가 상당히 낯설다. 후삼경자 아성상 4년 청 건륭 45년 6월 24일 신미일(後三庚子 我聖上4年 淸乾隆45年 6月24日 辛未日)이다.

후삼경자(後三庚子)는 명나라의 숭정(崇禎) 원년인 1628년 이후 세 번째 경자년이라는 뜻이다. ‘청 건륭 45년’은 청나라 건륭제 재위 45년째이고, ‘아성상 4년’은 정조 즉위 4년째라는 뜻이다. 음력 6월 24일은 건륭제 칠순 만수절인 음력 8월 13일보다 약 50일 앞둔 때였다. 연암이 이 먼 길에 나선 것도 바로 그 칠순을 축하하는 진하사행을 따라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연암은 왜 굳이 이렇게 복잡하게 연도를 적었을까. 그는 <도강록> 서문에서 직접 답한다. 숭정 연호를 쓰고 싶지만 이제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로 들어가는 몸이니 ‘숭정 두 글자를 노골적으로 쓸 수 없어 후삼경자라는 간지 속에 감추었다’는 것이다. 강 건너는 청의 땅이고 천하가 이미 청의 정삭(正朔)을 받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명을 중화라 부르고 압록강 동쪽의 조선이 명의 제도를 홀로 지키고 있다고 말한다. 북학론자 박지원 역시 여행을 시작하는 순간에는 여전히 숭명적 화이관의 강한 자장 안에 서 있었던 셈이다.

연암은 그와 동시에 청 건륭 45년도 표기했다. 1780년은 청이 산해관을 넘어 북경으로 입성한 1644년부터 이미 136년, 두 갑자(甲子) 120년을 훌쩍 넘긴 때였다. 청은 사라지기는커녕 오삼계의 삼번의 난을 평정하고 강력한 유목국가 준가르마저 제압하며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영조가 그토록 기다렸던 오랑캐의 운수가 다하고 중화가 다시 회복되는 황하지청(黃河之淸)의 날은 끝내 오지 않았다. 영조 자신도 “황하가 맑아지는 것이 어찌 이토록 기약이 없는가”라고 탄식하였지만 연암이 압록강을 건너던 때 청은 오히려 절정의 시대를 맞고 있었다.

이 낯선 연도 표기는 서로 모순되는 두 개의 세계를 한 줄에 담고 있다. 한쪽에는 망한 명나라에 대한 의리와 화이에 대한 기억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바로 눈앞에서 백여 년 넘게 번성하고 있는 청나라라는 현실이 있다. 연암은 그 둘 중 하나를 선택하거나 버리지 않았다. 명을 기억하면서도 청을 보았고 청을 오랑캐라 부르면서도 그들의 벽돌과 수레와 도로 등 선진 문명을 눈여겨보았다.

그렇다면 『열하일기』 첫머리 ‘후삼경자 아성상 4년 청 건륭 45년’이라는 세 겹의 시간은 단순한 날짜가 아니라 앞으로 펼쳐질 세기의 기행일기를 읽어내라고 연암이 첫 장에 숨겨놓은 ‘다빈치 코드’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다. 226년 뒤 연암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우리 역시 중국을 바라보며 이념적 거부감과 강대국의 현실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연암이 ‘후삼경자’ 네 글자 속에 감춰두었던 긴장은 아직도 압록강을 건너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청나라 시기 조선 사행단이 통과하던 변문(邊門) 인근. 지금은 옛 국경의 흔적을 거의 찾기 어렵고 도로 표지판만 남아 있다.

2. 변문에서

우리는 이튿날 아침 단둥 숙소를 출발해 30분 만에 변문 앞에 도착했다. 200여 년 전 국경검문소가 있던 자리였다. 그러나 현지 가이드의 설명이 없었다면 그곳이 청의 ‘변문(邊門)’이라는 역사적 장소라고 생각할 여지는 조금도 없었다. 심지어 변문이라는 표지석 하나 없었다. 궁벽한 작은 농촌 마을일 뿐 국경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당시 변문은 긴 구릉을 조성하고 그 위에 버드나무를 심은 유조변(柳條邊)에 낸 문이었다. 조선 사람들은 울타리에 난 문이라 하여 책문(柵門), 현지인은 가자문(架子門), 청의 내지 사람들은 변문(邊門)이라 불렀다. 그러나 지금은 버드나무는커녕 구릉의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다. 그때 누군가 마을 입구 쓰레기더미 근처에서 ‘辺門’이라는 글자가 적힌 작은 도로표지판 하나를 발견했다. 우리는 그 정도에 만족해야 했다. 우리 일행의 사실상 첫 ‘연암의 발자취 따라가기’는 그렇게 허무하게 시작되었다.

현재의 변문 일대 마을 풍경. 200여 년 전 조선 사신들이 청나라 내지로 들어가던 길이 이제는 평범한 농촌 마을과 도로로 바뀌었다.

문득 226년 전 이곳에 섰던 마흔네 살의, 호기심 많은 연암을 떠올렸다. 우리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그는 오히려 눈동자를 크게 뜨고 청의 문물을 하나라도 더 보려 했을 것이다. 연암의 공부법은 이른바 ‘목수심교(目數心較)’였기 때문이다.

연암은 훗날 박제가의 『북학의』 서문에서 박제가가 사물을 “눈으로 살피고 헤아리며 마음으로 견주었다(目數而心較)”고 썼다. 그러면서 『북학의』와 자신의 『열하일기』가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 같다”고도 했다. 박제가를 두고 한 말이지만, 연암 자신의 여행법을 설명한 말로 읽어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그의 목수심교는 변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인원 점검과 세관 통관을 기다리면서도 그는 변문 안의 반듯하게 정비된 길을 살폈고, 문을 들어선 뒤에는 규격화된 벽돌과 수레에 눈길을 주었다. 우물의 도르래, 철테를 두른 물통, 어깨에 물통을 걸어 나르는 편담, 용량이 규격화된 술잔까지 그의 눈을 피해 가지 못했다. 남들이 하찮게 지나치는 생활도구 하나하나가 그에게는 조선과 비교하고 따져볼 문명의 자료였다.

당시의 연암에게 청인은 여전히 ‘오랑캐’였다. 그의 기록에도 오늘날에는 멸칭으로 들리는 ‘되놈’이라는 말이 거리낌 없이 등장한다. 사람을 오랑캐라 부르는 화이관과 그들의 좋은 제도를 배워야 한다는 북학 정신은 기묘하게 공존했던 것이다. 그가 본 것은 벽돌 한 장, 물통 하나, 수레 한 대와 같은 작은 물건들이었다. 그러나 생각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규격화된 도구는 노동을 덜고 물자의 이동을 편리하게 하며, 마침내 사회 전체의 효율을 높인다. 그 끝에 이용후생(利用厚生)이 있었다.

그리고 연암에게 이용후생은 단지 생활의 편리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백성의 삶이 넉넉해진 뒤에야 비로소 정덕(正德), 곧 올바른 덕의 정치도 가능하다고 보았다. 도덕을 앞세우고 생활의 문제를 뒤로 미루던 성리학적 사고의 순서를 뒤집는 발상이었다.

물론 너무 열심히 설명하다 보니 웃지 못할 일도 생겼다. 며칠 뒤 통원보를 떠나 길을 가면서 연암은 정진사에게 벽돌로 성을 쌓는 것이 조선처럼 제각각인 돌로 쌓는 것보다 얼마나 견고하고 효율적인지를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런데 한참 열변을 토하고 보니 정진사는 말 위에서 구부정하게 몸을 숙인 채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졸고 있었다.

화가 난 연암이 부채로 옆구리를 찌르며 소리쳤다.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어찌하여 듣지 않고 자는 게요!” 정진사가 웃으며 대답했다. “이미 다 들었습지요. 벽돌은 돌만 못하고, 돌은 잠만 못하다는 말씀 아닙니까.”(甓不如石 石不如睡也) 연암은 정진사를 때리려고 달려들었지만, 결국 두 사람은 함께 껄껄 웃고 말았다. 진지한 이용후생론도 ‘잠(睡)’ 한 글자 앞에서 잠깐 사이에 무용지물이 될 뻔했다.

문득 생각했다. 혹시 오늘의 우리도 정진사처럼 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중국은 이제 AI와 휴머노이드 로봇, 우주항공 같은 첨단기술에서 세계의 선두권을 다투고 있다는데 우리가 여전히 오래된 중국의 이미지만 바라보고 있다면, 200여 년 전 연암의 목수심교가 다시 필요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 연암 정신을 잇는 우리의 다음 여행지는 열하가 아니라 상하이나 선전이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이어진 봉황산. 연암은 땅에서 우뚝 뽑아 올린 듯한 산세를 극찬했다.

3. 봉황산성에서

변문을 무탈하게 지나 20㎞쯤 달리자 봉황산이 눈앞에 나타났다. 우뚝 솟은 산세의 장관이 펼쳐졌다.

연암도 봉황산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 구름 한 점 없는 봉황산은 순전히 돌로 만들어 땅에서 우뚝 뽑아 올린 듯했다고 했다. 손바닥 위에 손가락을 세운 듯하고, 부용화가 반쯤 피어난 듯하며, 하늘 끝에 피어오른 여름 구름처럼 빼어나게 깎아 세운 모습은 이루 형용하기 어려울 만큼 뛰어난 경관이었다.

그런데 연암은 뜻밖의 말을 덧붙인다. 그토록 장쾌한 봉황산에도 맑고 윤택한 맛은 부족하다는 것이다. 연암이 벌써부터 고국 산천이 그리웠던 걸까. 급기야 삼각산과 도봉산을 끌어들여 고국 산천을 자랑한다. 봉황산의 기세가 아무리 빼어나도 한양을 둘러싼 산천의 맑고 빛나는 기운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남의 산을 실컷 칭찬해 놓고 끝내 자기 고향 산에 한 표를 던지는 연암다운 심사였다.

봉황산 입구의 표지석. 연암 박지원은 1780년 이곳을 지나며 봉황산의 빼어난 산세를 『열하일기』에 자세히 기록했다.

우리는 봉황산을 넓게 두르고 있는 산성을 찾았다. 그러나 현재는 상당 지역의 접근이 제한되어 있어 산성의 전모를 제대로 살펴볼 수 없었다. 산성 입구 표지판 앞에서 봉황산을 배경으로 인증사진을 찍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고조선과 고구려의 옛 강역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연암도 이곳의 산성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는 봉황산 일대의 성을 고구려의 안시성으로 보는 견해가 있었지만 연암은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눈앞의 지형과 옛 기록을 대조하며 안시성의 위치를 따져 묻고, 더 나아가 평양과 패수의 위치까지 다시 문제 삼았다.

연암이 겨냥한 것은 단순히 성 하나의 위치가 아니었다. 후세의 선비들이 평양을 지금의 평양에만 고정하고 한사군과 고구려의 옛 지명을 압록강 이남으로 끌어당겨 해석하면서 스스로 조선의 옛 강역을 좁혀 버렸다는 것이다.

그는 개탄했다. “조선의 옛 강역이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줄어들었다.”(朝鮮舊疆 不戰自蹙矣)

연암의 기개를 떠올리니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들판에서 시원한 청량제를 마시는 듯했다. 문헌과 지리, 현장을 중시했던 실증적 연암이 다시 태어난다면, 그는 『환단고기』에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동북공정을 타도할 최고의 전사가 되었을 법하다.

청석령 넘어가는 초입. 희멀건 얼굴의 누렁이가 일행을 맞이한다. “음머~ 잘 다녀가시오, 음머~”

4. 청석령 가는 길

수려한 봉황산을 뒤로하고 다음 행선지로 정한 곳은 청석령이었다. 봉황산성에서 통원보와 연산관을 지나 청석령까지의 사행 거리는 160㎞ 정도다. 차를 이용하면 현지 도로 사정을 감안해도 세 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인데, 연암의 사행단은 봉황성에서 청석령까지 오는 데 무려 아흐레가 걸렸다. 보통이라면 사흘 남짓이면 갈 거리였지만 큰물을 만나 통원보에서 닷새 동안 발이 묶였기 때문이다.

뜻밖의 지체는 연암에게 평소라면 스쳐 지나갔을 청의 일상생활과 기술을 자세히 살펴볼 기회를 주었다. 만주족 여성의 복식과 생활상, 여관 주인의 살림살이와 문화 수준, 혼인 행렬과 돼지가 총에 맞아 죽는 장면까지 눈여겨보았다. 벽돌 가마의 구조와 캉(炕), 굴뚝을 살피며 조선의 가마와 온돌의 장단점을 비교하기도 했다.

밤에 순찰을 나온 청의 감시병이 우리말 ‘되놈이요’를 흉내 낸 “도이노음이요(擣伊鹵音爾幺)”라고 자신을 소개하자 놀라기도 했다. 심심풀이 노름판에서는 처음엔 초짜였던 연암이 타짜 역관들의 돈을 따먹고는 ‘지지불태(知止不殆)’라며 능청을 부렸다.

통원보를 떠난 뒤에도 고생은 끝나지 않았다. 연산관에서 청석령으로 향하던 길에는 불어난 강물을 건너다 연암이 타고 있던 말이 물속에서 몸을 기울여 하마터면 물에 빠질 뻔한 위기도 겪었다. 마운령과 청석령 같은 험한 고개도 연이어 넘어야 했다. 연암에게 청석령으로 가는 길은 분명 고행이었다.

그러나 그 고행은 헛되지 않았다. 통원보에 발이 묶여 있는 동안 연암은 벽돌과 온돌, 생활도구와 살림살이를 샅샅이 들여다보았다. 고난에서 배움을 얻는 파테이 마토스(pathei mathos)의 시간이었던 셈이다.

청석령 관제묘. 정면에서 촬영이 금지돼 측면만 나오게 찍었다 <사진 황효진>

그런데 이토록 많은 것을 보고 기록한 연암도 이 길에 묻힌 조선의 쓰라린 기억에는 뜻밖에 말이 없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636년 음력 4월, 심양에서 홍타이지의 국서를 가지고 돌아오던 조선 사신 나덕헌과 이확은 통원보 부근에서 그 국서를 몰래 버렸다. 훗날 병자호란 뒤 이 길을 따라 심양으로 끌려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수많은 조선 피로인의 행렬도 있었다. 그러나 연암은 그들을 특별히 회고하지 않았다. 이념의 과거보다 실용의 미래가 더 다급한 조선의 현실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마침내 당도한 청석령에서 연암의 눈길은 뜻밖에 따뜻해 보였다. 관우를 모신 관제묘에서 역관들과 말잡이, 시복 같은 하인들이 참외와 오이 등의 제물을 바치고 안행(安行)을 빌며 길흉을 점치는 모습을 보았지만, 연암은 그들에게 괴력난신(怪力亂神)을 거부하는 유교적 도덕을 들이대지 않았다. 그들의 소박한 믿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 일행은 통원보를 차창 밖으로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연암의 통원보 경험을 음미할 따름이었다. 다행히 우리는 연암도 점심을 먹었던 첨수참 근처에서 오찬을 하고, 그곳에서 청석령까지 약 10㎞의 왕복 구간을 직접 걸으며 사행단 흉내를 내볼 수 있었다.

30도를 훌쩍 웃도는 뜨거운 태양 아래 산길을 오르자 비지땀이 절로 흘렀다. 그러나 이 길이 단순한 사행 노정이 아니라 심양으로 끌려가던 피로인의 길이기도 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숙연해졌다.

이역만리 찾아왔건만 관제묘는 공사 중이어서 둘러볼 수 없었다. 연암 사행단에게 물건을 팔던 도사들이 환생이라도 한 듯 감시관들이 나타나 관제묘 출입은 물론 사진마저 찍지 못하게 하니 무척 야속했다.

전하기로는 이곳 청석령을 지나 심양으로 끌려가던 봉림대군이 비장한 「청석령가」를 읊었다고 한다.

청석령 지나거냐 초하구 어디메오
호풍도 차도 찰샤 궂은 비는 무슨 일고
뉘라서 내 행색 그려내어 임 계신 데 드릴고

청석령을 지나왔구나, 초하구는 어디쯤인가.
오랑캐 땅의 바람도 차고 또 차가운데 궂은비까지 웬일인가.
누가 내 이 초라한 행색을 그려 임금 계신 곳에 전해줄 것인가.

다만 최근 연구는 이 노래의 본래 주인이 봉림대군이 아니라 소현세자였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그럼에도 후대에는 봉림대군, 곧 효종의 북벌 의지가 움튼 노래로 굳어졌다. 『노가재연행일기』를 쓴 김창업의 형 김창흡도 이 「청석령가」를 효종이 와신상담하며 북벌 의지를 다진 노래로 읽었다. 그래서 후대의 많은 사행객들은 청석령 고개에 이르면 으레 봉림대군과 이 노래를 떠올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연암은 청석령에서 이 노래를 언급하지 않았다. 북벌의 기억보다 북학의 현실에 더 마음이 가 있었던 것일까.

청석령 고개를 되돌아오는 길에도 내 마음은 무거웠다. 속량전을 바치고 가까스로 환향(還鄕)하던 조선 여인들의 비애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연암이 이튿날 드넓은 요동벌에서 찾게 될 호곡장(好哭場)은 어쩌면 압록강에도, 청석령에도 이미 널려 있었는지 모른다.

봉황산성 일대. 산성을 둘러싼 봉황산의 지형이 눈에 들어온다. 30도를 웃도는 폭염 속에 여행길에 나선 객들은 뭔가 뚫어지게 바라보는 일행을 남겨두고 길을 재촉한다. <사진 황효진>

5. 호곡장을 찾아

우리의 다음 행선지는 요동벌판의 백탑이었다. 떠나기 전 시골 마을의 시원한 당산나무 그늘 아래서 수박 파티가 벌어졌다. 현지 가이드가 미리 준비해 둔 수박 덕분에 여행객들의 갈증이 말끔히 씻겨 내려갔다.

이제 산악지대를 빠져나와 확 트인 만주벌판을 바라볼 차례였다. 일행 모두의 마음이 들뜨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동하는 차 안에서도 모두 두 눈을 부릅뜨고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백탑이 보이는 드넓은 요동벌판을 기다리면서.

그런데 어찌 된 일인가. 산악지대를 벗어나 한참을 달려도 확 트인 벌판은 나타나지 않았다. 잠시 차를 세우고 지평선을 바라볼 만한 곳조차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백탑이 현신하기는커녕 요동벌판 자체가 공중 부양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결국 버스가 요양 시내로 들어선 뒤에야 현지 가이드의 차내 방송을 통해 사정을 알게 되었다. 예전에 요동벌판을 조망하던 지점은 사라졌고, 도시가 확장되면서 옛날처럼 탁 트인 벌판을 한눈에 바라보기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요동벌판에 들어와 있었다. 그러나 빌딩 숲 한가운데 서서 어찌 벌판의 진면목을 알 수 있겠는가. 천지간에 시야가 툭 터진 호곡장(好哭場)을 만나지 못하니 참으로 호곡(號哭)할 일이었다.

나는 니고데모의 엉뚱한 상상처럼 다시 모태의 좁고 캄캄한 곳으로 들어갔다가 넓은 세상으로 새로 태어나는 기분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연암이 말한 것처럼 ‘캄캄하고 막히고 좁은 곳에서 움츠리고 부대끼다가 넓은 곳으로 빠져나와 손발을 펴고 기지개를 켜며 마음과 생각을 확 틔우고, 참소리를 질러 억눌렸던 정을 크게 씻어내는’ 그 순간을 말이다.

그 기대는 허망하게 무너졌다.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는 얄밉게도 요양 백탑 앞에 멈추어 섰다. 연암의 눈에는 드넓은 벌판 위에서 삼분의 일을 차지할 만큼 크게 보였다는 백탑도 이제는 빌딩 숲 사이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그날만큼은 백탑도 백탑이 아니었다. 저녁 노을을 받아 붉게 타오르는 홍탑이었다.

홍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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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효진

인천광역시 글로벌도시정무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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