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칼럼

[이상기 칼럼] 원산 앞바다에서 숨진 21세 일본 청년…우리는 왜 그를 기억하지 못했나

1950년 6·25전쟁 당시 한반도 해역의 기뢰 제거작전에 투입된 일본 특별소해대 관계자들. 일본은 연합군최고사령부(SCAP)의 요청으로 해상보안청 소속 소해정과 인력을 파견했다. 같은 해 10월 17일 원산 앞바다에서 소해정 MS-14가 기뢰에 접촉해 침몰하면서 승조원 나카타니 사카타로가 숨지고 다수가 부상했다. 사진 일본 해상자위대 자료.

6·25전쟁 당시 일본 특별소해대 한반도 투입
기뢰 제거 중 나카타니 사카타로 사망
식민지배 책임과 별개로 ‘잊힌 역사’도 기록해야

6·25전쟁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미국을 비롯한 유엔 참전국을 떠올린다. 영국, 캐나다, 튀르키예, 호주 등 전투병력을 파견한 16개국과 의료지원국의 이름도 이제는 제법 익숙하다. 그런데 우리가 거의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1950년 가을 한반도 바다에서 기뢰를 제거했던 일본인들이다.

여러 사람과 동북아 정세를 놓고 이야기를 나누던 자리에서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6·25전쟁 당시 일본의 소해부대가 한반도 해역에 들어와 기뢰를 제거했고, 그 과정에서 일본인 희생자까지 발생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나 역시 귀를 의심했다.

일본은 6·25전쟁의 유엔 참전국이 아니다. 1945년 패전 뒤 연합국 점령 아래 있었으며 오늘날의 자위대도 존재하지 않았다. 1947년 시행된 일본 헌법 9조는 전쟁과 무력행사를 포기한다고 규정했다. 그런 일본의 배와 일본인이 어떻게 전쟁 중인 한반도 바다에 들어왔을까.

확인해보니 기록은 분명했다. 일본 아시아역사자료센터(JACAR)에 따르면 1950년 10월 2일 연합군최고사령부(SCAP)의 요청에 따라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소해정들이 한국 해역의 기뢰 제거작전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당시 일본 특별소해대는 소해정 20척과 순시선 4척, 시험선 1척으로 구성됐으며, 10월 6일 미 해군 소해부대 지휘관의 지휘 아래 출항했다. 이들은 약 두 달 동안 원산·인천·군산·진남포·해주 주변 해역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1950년 11월 14일 북한 원산 앞바다에서 미 해군 소해정 승조원들이 기뢰 제거작업을 벌이고 있다. 같은 해 10월 일본 특별소해대도 원산 해역에 투입됐으며, 10월 17일 일본 소해정 MS-14가 기뢰에 접촉해 침몰하면서 나카타니 사카타로가 숨지고 18명이 부상했다. 사진 미 해군 역사유산사령부·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미 해군 기록은 규모를 더 넓게 보여준다. 한국전쟁 전체 과정에서 일본은 계약 소해정 43척, 순시선 10척, 시험선 1척과 약 1200명의 인력을 제공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미 해군은 당시 일본 소해요원들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근해에 설치된 기뢰를 제거하며 세계적으로도 높은 경험을 축적하고 있었다고 평가한다.

그들이 필요했던 이유는 절박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전세가 뒤집히자 유엔군은 원산상륙작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원산 앞바다는 거대한 기뢰밭이었다. 일본 방위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북한 측은 소련 해군의 지원을 받아 수천 발의 기뢰를 설치했다. 원산상륙작전은 기뢰 제거 문제로 당초 계획보다 지연됐다.

그리고 1950년 10월 17일 사고가 일어났다. 원산 앞 영흥만에서 작전하던 일본 소해정 MS-14가 기뢰와 접촉해 침몰했다. 한 명이 숨지고 18명이 부상했다. 미 해군 역시 MS-14가 원산 접근로에서 기뢰에 부딪혀 침몰했고, 이 사건이 일본 내 정치적 파장을 일으킬 것을 우려해 더글러스 맥아더가 보도통제를 지시했다고 기록한다.

숨진 사람은 나카타니 사카타로(中谷坂太郎). 스물한 살이었다. 일본 측 연구에 따르면 소해작전 때는 기뢰 접촉 위험 때문에 승조원들이 갑판의 안전구역에 대기하도록 했다. 하지만 나카타니는 저녁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선창의 식량 저장공간으로 내려갔다가 폭발을 피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장례식은 열흘 뒤 일본 구레에서 열렸다. 스물한 살 청년의 마지막 자리가 원산 앞바다가 된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뒤의 침묵이다. 일본 방위연구소 자료에는 2003년 가가와현 고토히라구에서 열린 소해 순직자 추도식에 나카타니의 형과 동생이 참석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일본 내부에서도 그의 죽음과 한국전쟁 특별소해대의 존재는 오랫동안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당시 일본은 연합국 점령 아래 있었다. 평화헌법을 시행한 지 불과 3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 일본의 정부기관 소속 인력이 해외 전쟁지역에 들어가 미군 작전을 지원했다는 사실은 일본 국내정치에서 매우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도 부담스러운 문제였다. 미 해군 기록이 일본 소해정의 38선 이북 투입을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라고 명시한 것도 그래서다.

그러나 76년이 흐른 지금까지 우리가 이 사실을 외면할 이유가 있을까. 여기서 반드시 분명히 할 것이 있다. 일본의 식민지배와 일본인 소해요원의 한국전쟁 참여는 서로 상쇄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배가 남긴 고통과 책임은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기억해야 한다. 한국전쟁 당시 일본인들이 한반도 해역에서 기뢰 제거작업을 했다는 사실을 기록한다고 해서 식민지배의 책임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식민지배의 역사가 고통스러웠다는 이유로 1950년 원산 앞바다에서 실제 일어난 일까지 역사에서 지워서는 안 된다. 나카타니 사카타로는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침략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군인이 아니었다. 패전 5년 뒤인 1950년, 북한 측이 설치한 기뢰를 제거하는 작업에 참여했다가 스물한 살에 목숨을 잃었다.

그의 이름 하나를 기억한다고 대한민국의 역사관이 흔들릴 리 없다. 오히려 이런 사실을 정확히 기록할 수 있을 때 우리의 역사 인식은 더 단단해진다. 나는 우리 전쟁기념관과 6·25전쟁 관련 기관들이 이 문제를 한번 제대로 살펴봤으면 한다. 일본 특별소해대가 언제, 어떤 경위로 한반도에 왔는지, 몇 명이 참여했고 어디에서 어떤 작전을 했는지, 나카타니는 어떻게 숨졌는지 자료를 모아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사실관계가 확인된다면 전쟁기념관 한쪽에 그 기록을 남기면 어떨까. 거창한 기념비일 필요도 없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일본 특별소해대가 한반도 해역의 기뢰 제거작전에 참여했으며, 10월 17일 원산 앞바다에서 MS-14가 침몰해 21세 나카타니 사카타로가 숨졌다.” 그 정도의 기록이면 충분하다.

그것은 일본에 대한 감사의 표시 이전에 대한민국이 자기 역사를 정확히 기록한다는 표시다. 한일관계는 늘 역사 앞에서 멈춰 서곤 한다. 때로는 일본이 역사를 외면해서이고, 때로는 서로 보고 싶은 역사만 보려 하기 때문이다.

과거를 잊어야 미래로 갈 수 있다는 말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기억할 것은 정확히 기억하고, 사과할 것은 사과하고, 평가할 것은 평가하고, 고마워할 일이 있다면 그것 역시 사실대로 기록할 때 비로소 다음으로 갈 수 있다.

1950년 10월 17일 원산 앞바다. 기뢰 한 발이 터졌고 작은 소해정 한 척이 가라앉았다. 그 배 안에 있던 스물한 살 청년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76년이 지난 지금 그의 이름을 한번 불러본다. “나카타니 사카타로.” 그 이름을 우리 전쟁사의 한 귀퉁이에 기록하는 것에서 한일 양국의 또 다른 역사 대화가 시작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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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기

아시아엔 기자, 전 한국기자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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