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칼럼

‘군화의 무게’…조롱의 대상이 아니라, 책임을 묵묵히 감당하며 걸어온 삶의 궤적이다

개미고개 기념비 <사진 황건>

얼마 전 개미고개를 찾았다. 이곳에는 “The Splendor of Peace and Freedom”이라는 문구와 함께 미 제21보병연대의 전적을 새긴 기념탑이 서 있다. 1950년 7월 천안전투 이후, 리처드 스테펜스 대령이 이 낮은 능선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닷새 동안 지연시켰던 곳이다. 그러나 내 발길을 붙잡은 것은 기념탑보다도 작은 조형물이었다. 바위에 꽂힌 총검, 그 위에 놓인 철모, 그리고 발자국 옆에 벗어 놓인 군화 한 켤레.

오늘은 그 군화를 생각해 본다.

진료실 옆 치료실에서는 얼굴 상처를 소독하거나 봉합할 때 환자들이 침대에 눕는다. 대부분 신발을 벗으려 하지만 우리는 굳이 벗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발밑에 일회용 발판만 깔면 된다. 군인들은 군화를 신고 벗는 일이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다.

며칠 전에는 신임 간호장교 소위가 병실에 와서 내가 환자의 상처를 소독하는 모습을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아직 근무복과 간호화 대신 군복을 입고 군화를 신고 있었는데, 군화 밖으로 살짝 보이는 양말이 유난히 두꺼워 보였다.

“양말이 제법 두껍네요.” 내 말이 끝나자 옆에 있던 선배 간호장교들까지 웃으며 한 목소리로 말했다. “맞습니다. 군화를 신으면 발이 많이 덥습니다.” 순간 병실에 웃음이 번졌다.

생각해 보니 군화를 신어 본 사람들끼리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는 것들이 있다. 두꺼운 양말을 신는 이유도, 하루가 끝나면 발이 얼마나 무거워지는지도, 오래 서 있거나 뛰고 나면 발바닥이 어떻게 달아오르는지도 말이다.

지난해에는 오랫동안 함께 근무했던 의무사령부 주임원사의 전역식이 외상센터 강당에서 열렸다. 30여년의 군 생활을 마치는 자리였다. 군악대까지 동원된 성대한 행사였지만, 내 기억에 가장 오래 남은 것은 그의 마지막 인사였다. “처음 군에 들어왔을 때부터 군화의 무게를 어떻게 감당할 지 걱정했습니다. 이제 군화를 벗게 되니 가볍습니다.”

그 말은 신발의 무게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책임의 무게였고, 긴장과 의무의 무게였으며, 수많은 밤과 현장을 견뎌 온 세월의 무게였다.

나는 대한응급구조사협회 군진지회가 주최하는 군응급구조사 세미나에도 매년 참석한다. 부상병과 가장 먼저 마주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몇 해 전에는 강의를 했고, 2018년 받은 감사패는 지금도 연구실 한편에 놓여 있다. 군화 한 켤레에 군화끈이 꿰어진 독특한 조형물이다.

돌이켜 보면 내가 만난 군화들은 모두 책임의 무게를 품고 있었다.

개미고개의 벗겨진 군화, 진료실에서 환자가 벗지 않아도 되는 군화, 갓 임관한 간호장교의 새 군화, 30여 년의 군 생활을 마치며 벗은 원사의 군화, 그리고 생명을 살리기 위해 가장 먼저 달려가는 군응급구조사들의 군화. 군화는 계급보다 먼저 같은 책임을 나누게 하는 신발이었다.

그래서일까. 요즘 군화가 본래의 의미와는 다르게 소비되거나 가볍게 다루어지는 모습을 볼 때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군화는 조롱의 대상이 아니라, 누군가가 자신의 책임을 묵묵히 감당하며 걸어온 시간을 담고 있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나는 군의관으로 재직하며 많은 군화를 보았다. 그 군화들은 전쟁을 자랑하지 않았고 권력을 말하지도 않았다. 다친 전우에게 달려가고, 환자의 곁을 지키고, 맡은 임무를 끝까지 수행하려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말없이 품고 있었다.

개미고개의 군화는 지금도 아무 말이 없다. 침묵은 때로 가장 긴 이야기가 된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평화와 자유는, 과연 누구의 군화가 닳아 이루어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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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

이대 해부학교실 초빙교수, 인하의대 명예교수, '인류의 전쟁이 뒤바꾼 의학세계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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