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람

‘친일’ 대 ‘저항’ 흑백논리 넘어선 반전…’친일 신현확’ 이름 지운 결정적 문서

2008년 봄. 대한민국은 친일 청산의 거센 흐름 속에 있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와 친일재산조사 위원회라는 두 개의 거대한 기구가 과거를 파헤치고 있었다.

4700명.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이름들이었다. 그 명단에 포함된 사람들의 후손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언론은 연일 보도했다. “친일파 후손이 잘사는 나라, 독립운동가 후손이 가난한 나라.” 시대는 과거를 향해 칼을 들고 있었다.

나는 그 무렵 여러 사건을 맡고 있었다. 소설가 김동인의 아들과 딸이 찾아왔다. “아버지가 친일 소설을 썼다고 합니다.” 자식들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렸다. “아버지는 그 시절 민족주의자로 세 번이나 감옥에 다녀온 분이에요. 그런데 친일파라니요.” 나는 자료를 뒤졌다.

김동인은 일제 말기 일장기의 디자인이 깔끔하다는 취지의 칼럼을 쓴 적이 있었다. 단순한 미적 평가에 가까운 표현이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친일 논란이 제기되고 있었다. 그는 <감자>, <배따라기>를 쓴 한국 근대문학의 개척자였다.

법정에서 나는 주장했다. “김동인이 일제 말기 문인 대표 자격으로 전선 위문단에 참여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의 전체 생애와 문학적 기여까지 함께 봐야 합니다.”

판사는 냉정했다. “재판부는 해당 행위 자체를 판단합니다.” 우리는 졌다. 그 무렵 경성방직 창업주 김연수 집안에서도 찾아왔다. “할아버지는 일제시대에 사업을 했을 뿐입니다.” 나는 알고 있었다. 김연수는 삼양사를 키웠고, 동아일보와 고려대학교 설립에도 기여했다.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는 평가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일제 말기 중추원 참의에 임명됐었다. 실권 없는 명예직 성격이 강했지만 위원회의 판단은 단호했다. “일제시대 관직은 그 자체로 친일 행위입니다.” “일제시대 축적 재산은 친일 협력 재산입니다.” 또 졌다.

나는 회의가 들었다. 과거가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가. 일제강점기 35년이 해방 이후 60년을 지워버리는가. 김동인의 문학은? 김연수의 경제적 기여는? 시대는 그것을 보지 않는 듯했다. 오직 ‘친일’이라는 낙인만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신현확 재판은 더욱 절망적으로 느껴졌다.

김동인도 졌다. 김연수도 졌다. 신현확이 이길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증거도 없었다. 재판은 일주일 뒤였다.

재판 사흘 전. 나는 사무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세 개의 파일이 놓여 있었다. 김동인. 김연수. 신현확. 세 사람 모두 일제강점기를 살았다. 세 사람 모두 해방 이후 나름의 기여를 남겼다. 하지만 시대는 과거만을 묻고 있었다. 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하늘이 어두웠다.

바로 그때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신철식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연락이 왔어.” 나는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왜?” “자료를 찾았대.” “그런데….” 신철식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떨렸다. “우리한테 먼저 알려줬어.” “뭐라고?” “알려준 사람이 신정학원과 관련 있는 사람이야.” “신정학원?” “내가 대학 시절 만들었던 야학.”

신철식이 잠시 말을 멈췄다. “내가 그 야학 창립 멤버였다는 걸 어디선가 들은 모양이야. 그래서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 같아.” 신철식과 대학생 몇 명이 만들었던 야학이었다. 공장 노동자들. 중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청년들. 배움에 굶주린 사람들. 그들에게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고 세상을 보는 눈을 열어주려 했던 곳이었다. 신철식은 그곳의 창립 멤버였다.

얼마 뒤 미군정 문서 복사본이 우리 손에 들어왔다.

<미합중국 군정청> <일본 정부 인사 기록 인수 목록> <1946년 2월 작성> 그 안에 신현확의 이름이 있었다. <신현확> <군수관리관 발령: 1945년 7월 15일> <부임: 불이행> <비고: 낙향한 듯(落鄕)> 나는 한참 동안 그 문서를 바라봤다. ‘정말 이런 사람이 있었구나.’ 나 같으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진실은 태평양을 건너 우리에게 왔다.

사흘 뒤 법정이 열렸다. 민족문제연구소 측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판장님.”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화해를 요청합니다.” 더 이상 다툴 뜻이 없다는 의미였다. “저희가 새로 발견한 자료에 따르면 신현확 씨는 군수관으로 발령받았으나 실제 부임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그가 서류를 제출했다. 판사가 서류를 살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자료군요.” “예. 1946년 미군정이 일본 정부로부터 인수한 인사 기록입니다. 신현확 씨가 부임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명확히 기록돼 있습니다.”

신현확(오른쪽) 신철식 부자

신현확 씨의 친일파 규정이 부정되는 순간이었다.

“이 자료에 따라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에서 신현확 씨 이름을 삭제하기로 했습니다. 따라서 화해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역시 비겁하지는 않았다. 다만 공식 패소 기록을 남기고 싶어 하지 않는 듯했다. “화해하겠습니다.” 옆에 있던 신철식이 조용히 말했다.

재판 결과는 중앙일보에 크게 보도됐다. 제목은 ‘일제시대를 친일 대 저항이라는 흑백 논리로만 평가할 수 있나’였다. 인터뷰에서 신철식은 이렇게 말했다. “사실 그 문서를 발견한 것은 제가 아니라 민족문제연구소 측이었습니다. 그들도 재판 자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문서를 발견한 것입니다. 이번 일을 겪으며 한 사람의 삶을 평가할 때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제 경우처럼 입증 자료가 발견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억울한 사람이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에필로그

친일 명단에 오른 4700명의 후손들. 그들은 모두 숨죽이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면 풀처럼 엎드려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신철식은 달랐다. 그는 소송을 제기했고, 끝내 이겼다. 아버지와 아들, 두 사람은 시대의 폭풍 앞에서 당당히 맞섰다.

승리는 예상 밖의 곳에서 왔다. 신철식이 대학 시절 했던 야학 활동. 그때 가르쳤던 학생이 결정적 증거를 전해주었다. 나는 거기서 세상의 인과를 봤다. 선행은 우주의 어딘가로 흘러갔다가 몇십 배, 몇백 배가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나는 왜 이 사건을 맡았을까. 시대의 우뚝 솟은 산 같았던 그를 제대로 알아보고 싶었다. 그는 중요한 순간마다 올바른 선택을 했다. 그 선택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궁금했다.

나는 세상을 ‘구조’로만 보지 않고 ‘개인’으로 보고 싶다. 한 인간을 과거만으로 판단하지 말고, 그의 전체 생애와 현재의 모습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믿는다. 십자가 위에서 참회한 오른쪽 편 강도를 받아들인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고 싶다.

법정 기록은 남아도 그 안의 인간은 남지 않는다. 판결문은 남아도 그 과정의 역사는 증발한다. 나는 16년 만에 이것을 쓴다. 변호사이자 기록자로서.

고등학교 1학년 시절, 내 옆자리에 앉았던 신철식이라는 부잣집 아이는 내게 따뜻한 사랑을 베풀었다. 그는 내 양철 도시락을 자기 것과 바꾸어 먹자고 했다. 그때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포근함과 위로를 느꼈다. 야학에서 가르쳤던 학생이 결정적 순간 증거가 되어 돌아왔듯, 나 역시 변론으로 그 마음에 보답하고 싶었다.

2024년 12월 3일 밤.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나는 텔레비전 앞에 앉아 1979년 10월 26일을 떠올렸다. 1980년 5월 17일도 떠올렸다. 그리고 신현확을 떠올렸다. 흔들리는 대한민국호에서 그는 닻이었다.

이번에는 누가 닻이었을까. 누가 장갑차 앞에 섰을까. 누가 “이것은 내란이다”라고 외쳤을까.

지난 40년 동안 변호사인 내게 다가온 사건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의미였다.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앞으로도 그 의미의 기록자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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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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