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찬일의 칸 통신④] 걸작의 탄생…2026 칸의 발견 ‘도라’

정주리 감독은 장편 데뷔작 <도희야>로 2014년 공식 섹션 ‘주목할 만한 시선’에, <다음 소희>로는 2022년 또 다른 병행 섹션인 비평가주간 폐막작으로 칸을 찾은 바 있다. 두 편이 비공식 섹션이긴 해도, 정 감독은 장편 연출작 세 편이 모두 칸에 입성하는 단연 주목할 만한 쾌거를 일궈냈다. <추격자>와 <황해>, <곡성>, <호프>까지 전작 네 편이 모두 공식 부문에 초대된 나홍진 감독에는 다소 못 미치더라도, 흔치 않은 기념비적 성취랄까.
자연스럽게 떠오른 의문은 “그런데 왜 올 칸의 선정위원회는 이 걸작을 경쟁작 중 하나로 선택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었다. 종 22편 중 12편을 관람한 18일 밤 현재, <도라>는 그 어떤 경쟁작에도 밀리지 않는, 아니 대부분을 상회 내지 압도하고도 남을 수준을 구현했기에 품어보는 물음이다.
<도라>를 향한 내 극찬성 평가는 다분히 개인적·주관적인 것이 사실이다. 주변에 그 어떤 누구도 나만큼 그 걸작에 열광하거나 사로잡힌 것은 아니다. 평소 친하게 지내는 한 저널리스트는 자리를 지키기가 쉽지 않아 상영 도중에 나왔다고까지 했다. 여하튼 <도라>가 칸 공식 섹션에 비선택된 이유들에 대해 짐작 가는 바가 없진 않지만, 여기서 상술하진 않으련다. 다만 나홍진과 더불어 정주리 감독이 칸 경쟁 부문에 입성했더라면 올 칸이 외연과 내포 면에서 그만큼 더 넓고 깊어졌을 텐데 싶은 아쉬움 정도만 피력하련다.
<호프>와 <도라>는 더 이상 불가능하리만치 영화의 거의 모든 층위에서 대조적이다. 그만큼 한국영화들이 다양하고 다채롭다는 사실을 두 영화는 여실히 보여준다. 영화적 수준이나 호불호 등을 떠나, 개막작을 포함한 프랑스 영화들이나 2026 칸 주빈국(Country of Honor)답게 세 편의 경쟁작(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상자 속의 양>, 하마구치 류스케의 <올 오브 어 서든>, 후카다 코지의 <나기 노트>)을 입성시킨 일본영화들의 어떤 유사성과 닮은꼴과는 확연히 다른 한국영화만의 고유한 경향과 특징을 두 영화가 증거한다. 연상호 감독의 <군체>까지 고려하면, 그 다채로운 개성에 감탄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한국영화는 그동안 다양성이 결여됐다는 등의 비판, 아니 비난을 국내외에서 끊임없이 받아왔으나, 지난 30년간 적잖은 해외 영화제들을 겪으며 깨닫게 된 현실은 그 정반대다. 내게 올 칸의 으뜸 수확 중 하나는 한국영화의 다양성을 새삼 확인했다는 것이다.

이제 <도라>의 줄거리를 간단히 소개해보자. 엄마와 아빠, 고3 딸 셋으로 이뤄진 한 가족이 서울을 떠나 어느 바닷가 시골 마을 별장을 찾는다. 알 수 없는 병을 앓는 딸 도라의 요양을 위해서다. 하지만 치료가 필요하긴 아빠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 가족에 이어, 아빠와 친한 화가 후배와 일본인 아내, 어린 두 남매로 구성된 또 다른 가족이 근처로 이사 온다. 언뜻 평범하지 않은 두 가족 이야기로 비칠 수도 있으나, “도라가 처음으로 사랑을 알게 되며 모든 것이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한다.
‘도라’는 지그문트 프로이트로 하여금 전이와 역전이의 임상적 중요성을 알게 해준 결정적 연구 사례의 여성 주인공 이름이다. 본명은 이다 바우어(Ida Bauer)로, 프로이트의 남성중심적이고 자신의 이론을 입증하고 싶은 욕심에서 비롯된 성중심적·권위적 분석 태도를 보여준 사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영화는 프로이트의 도라 연구를 감독이 직접 쓰고 극화했다. 그 서사를 따라가는 맛과 재미가 여간 강렬한 게 아니다.
‘도라’의 엄마가 남편과 딸을 두고 일찌감치 서울로 돌아가고, 도라를 축으로 영화 속 여섯 캐릭터 사이에 펼쳐지는 관계의 드라마를 관류하는 극적 긴장감이 압권이다. 여느 웰메이드 서스펜스 영화 못지않다. 아니, 능가하고도 남는다.
더러는 충분히 예측되기도 하지만, 긴장감의 실체가 드러나는 디테일의 반전적 묘미 또한 강렬하다. 도라는 아버지를 포함해 한 명도 예외 없이 다섯 주변 인물들과 다층적 관계를 맺는데, 그 면면을 지켜보는 재미가 상당하다. 도라의 사랑 대상이 드러나는 후반부와 예측불허의 결말부에 다다르면 그 묘미에 얼얼할 지경이다.
그 묘미가 가능한 것은 무엇보다 ‘도라’로 분한 신예 김도연과 일본인 나미로 분한 스타 안도 사쿠라 두 여배우의 인상적 열연 덕분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두 배우는 선악의 경계가 와해된 캐릭터를 더할 나위 없이 입체적이고 복합적으로 구축하는 데 성공한다. 정신적 차원에서나 육체적 차원에서나 공히 그렇다. <도라>가 경쟁작이었다면 여우주연상 유력 후보로 손색없었을 법하다.
사실 안도 사쿠라의 호연은 새삼스러울 게 없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에게 2018년 칸 황금종려상을 안긴 <어느 가족>과 2023년 각본상을 안긴 <괴물> 등을 통해 일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세 차례나 거머쥔 최상급 여배우니 말이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그간의 영화들과는 또 다른 경지의 인생 연기를 펼친다.
김도연은 또 어떤가. 안도 사쿠라에 전혀 밀리지 않는다. 그에게서 <은교>(정지우, 2012)의 김고은과 <아가씨>(박찬욱, 2016)의 김태리를 떠올리는 것은 비단 나만은 아닐 테다. 확신컨대 대형 신인의 출현이다.
감독의 의도 여부를 떠나, <도라>를 보고 들으며 박찬욱과 고(故) 김기덕의 결합을 감지했고, 심지어 프랑스의 이단적 명장 알랭 기로디의 <도주왕>(2012) 같은 영화도 떠올랐다. 또한 올 칸의 세 일본 경쟁작들에는 부재하는 어떤 지적 자극과 정서적 가치(센티멘털 밸류), 그리고 감각적 자극까지 맛볼 수 있었다.
좀 더 거창하게 평하자면 <도라>는 권력의 편재성을 역설한 미셸 푸코나, 어긋날 수밖에 없는 욕망의 기제를 설파한 자크 라캉을 영화적으로 체현하는 수준에까지 나아간 듯하다. 이쯤 되면 ‘올 칸의 발견’이라는 내 평이 과장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한편 <호프>에 대한 칸 현지 저널들의 평가는 크게 엇갈리고 있는 중이다. 15인의 프랑스 저널리스트 및 평론가로 구성된 르 필름 프랑세에서는 6명이 평점을 부여해 평균 1.5점(4점 만점)에 그쳤으나, 스크린 인터내셔널 12인 평단 평점에서는 평균 2.8점을 받으며 화제몰이를 하고 있다.
영화는 파벨 파블리코프스키의 <파더랜드>(3.3점)와 하마구치 류스케의 <올 오브 어 서든>(3.1점)에 이어, 제임스 그레이의 <페이퍼 타이거>와 함께 선두권을 달리고 있다. 그래서일까. <호프>의 본상 수상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점쳐지는 분위기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