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칼럼

족보에 불편한 이름들이 끼어 있는 까닭

우리는 ‘다윗’처럼 시작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현실은 ‘사울’처럼 시작합니다. 서툴고 어설픈 자리에서 시작합니다. 어떤 시작에도 실수와 실패의 얼룩 한두 개쯤은 남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 얼룩을 가리고 싶어서 ‘진짜 시작’, ‘본격적인 시작’을 따로 두곤 합니다. 부끄러웠던 시절은 예외였다고 괄호 안에 넣어 두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괄호 속에 넣지 않으십니다.-본문 중 <AI 생성 이미지>

인간됨의 흔적, 하나님되심의 증거

“넬은 기스를 낳고 기스는 사울을 낳고 사울은 요나단과 말기수아와 아비나답과 에스바알을 낳았으며”(역대상 8:33)

역대기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의 기록입니다. 맨바닥에서 나라를 다시 일으켜야 하는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입증하려는 목적으로 쓰인 책입니다. 그래서 역대기 기자는 족보에 각별한 신경을 씁니다. 무려 9장에 걸친 족보는 다윗 언약과 다윗 왕조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한 일종의 선언문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족보에 불편한 이름들이 끼어 있습니다. 역대상 8장에는 베냐민 지파와 사울 가문의 이름이 잔뜩 등장합니다. 사울이 누구입니까? 실패한 왕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부끄러운 이름입니다. 게다가 베냐민 지파는 또 누구입니까? 사사 시대, 불미스러운 일의 한복판에 있다가 이스라엘 전체를 대적했던 지파입니다. 다윗 왕조의 정통성을 자랑하려는 책에 굳이 그 이름들을 새겨 넣을 이유가 있을까요?

국가의 시작을 어디로 잡느냐는 단순한 연대 문제가 아닙니다. 정체성과 방향을 결정하는 작업입니다. 나라를 새로 시작하는 마당에 다윗 이전의 역사를 깔끔하게 정리하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역대기는 사울 가문을 족보에 당당하게 올립니다.

왕조의 정통성을 강조하던 시대에 실패한 왕의 이름을 지우지 않은 것은 하나의 메시지입니다. 성경은 그 부끄러운 역사를 모른 척하지도, 미화하지도 않습니다. 불편한 이름을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 있는 그대로 둡니다. 실패는 지워야 할 오점이 아니라, 보존해야 할 ‘인간됨’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윗’처럼 시작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현실은 ‘사울’처럼 시작합니다. 서툴고 어설픈 자리에서 시작합니다. 어떤 시작에도 실수와 실패의 얼룩 한두 개쯤은 남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 얼룩을 가리고 싶어서 ‘진짜 시작’, ‘본격적인 시작’을 따로 두곤 합니다. 부끄러웠던 시절은 예외였다고 괄호 안에 넣어 두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괄호 속에 넣지 않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삼상 16:1)

사울은 자신이 완전히 버려진 줄 알았겠지만 하나님의 책에는 그의 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왕좌에서는 끌어내리셨지만 족보에서는 지우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흔적을 제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족보는 생각보다 깔끔하지 않습니다. 군데군데 얼룩이 남아 있습니다. 그 오점들을 보정하지 않으신 채로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인간됨’을 품으신 ‘하나님 되심’의 흔적입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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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문섭

베이직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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