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문화

불타는 몸 앞에서…외과의사가 본 ‘몸을 바친다’는 것

문학과 이념은 때때로 몸을 상징으로 만든다. 그러나 수술실에서 만나는 몸은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고통받는 살아 있는 조직이며, 끝내 생존하려 애쓰는 한 인간 자신이다. 어쩌면 외과의사가 배워야 하는 가장 어려운 윤리는 바로 그것인지도 모른다. 몸을 단지 메시지의 도구로 보지 않는 일. 그리고 어떤 신념 앞에서도, 인간의 육체 자체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는 일 말이다.-본문에서 사진은 등신불 드라마 이미지

전공의 시절, 나는 몇 명의 분신 화상 환자를 치료한 적이 있다. 그들은 대부분 젊었고, 놀랍게도 몇몇은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읽은 등신불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그 시절 한국 사회에서 “몸을 불태운다”는 행위는 단순한 자살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어떤 이에게 그것은 저항이었고, 어떤 이에게는 마지막 항의였으며, 또 어떤 이에게는 스스로를 제물로 바치는 의식처럼 여겨졌다. 불길은 절망과 동시에 숭고함의 상징으로 소비되곤 했다.

그러나 화상병동에서 보는 불은 문학 속의 불과 달랐다. 불길은 피부를 태우고, 기도를 부풀게 만들고, 폐를 망가뜨린다. 살아남은 환자들은 수차례 피부이식을 받아야 했고, 손가락은 서로 들러붙었으며, 목은 앞으로 당겨졌다. 감염과 패혈증은 끈질겼고, 통증은 오래 지속되었다. 외과의사는 불길 속에서 상징보다 먼저 조직을 본다. 몸은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남으려 한다.

그중 한 사람은 6선 국회의원의 운전기사였다. 거창한 민주주의 이념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절망감이 더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며칠 동안은 이른바 민주화 인사들이 병실에 찾아왔고, 약간의 성금도 놓고 갔다. 사람들은 그의 행동 속에서 어떤 시대적 의미를 읽으려 했다.

그러나 병실 안의 현실은 달랐다. 드레싱을 갈 때마다 떨어져 나오는 피부, 반복되는 고열, 점점 약해지는 호흡. 그리고 결국 그는 살아남지 못했다. 나는 그 무렵부터 “몸을 바친다”는 말에 대하여 조심스러워졌다.

사회와 종교는 종종 타오르는 몸을 상징으로 만든다. 누군가는 그것을 순교라고 부르고, 누군가는 소신공양이라 부르며, 또 누군가는 숭고한 저항이라 부른다.

초기 기독교의 순교자 성 라우렌시오(Saint Lawrence) 역시 불과 쇠 위에서 죽었다고 전해진다. 로마 제국 아래에서 그는 신앙을 지키다 처형당한 피해자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세월이 흐른 뒤 중세 교회는 다시 다른 이들을 화형에 처했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어떤 이들이 스스로 불길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시대와 명분은 달라도, 인간은 반복해서 몸을 불의 언어로 사용해 왔다.

하지만 외과의사의 눈에는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다. 불길 속에서도 인간의 몸은 끝까지 살아남으려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자기 몸을 태운 사람들을 쉽게 비난하지도, 그렇다고 함부로 숭고화하지도 못한다. 그들의 절망과 시대적 맥락은 이해하려 노력하지만, 동시에 불길 속에서 무너져가는 인간 육체의 고통을 너무 가까이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문학과 이념은 때때로 몸을 상징으로 만든다. 그러나 수술실에서 만나는 몸은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고통받는 살아 있는 조직이며, 끝내 생존하려 애쓰는 한 인간 자신이다. 어쩌면 외과의사가 배워야 하는 가장 어려운 윤리는 바로 그것인지도 모른다. 몸을 단지 메시지의 도구로 보지 않는 일. 그리고 어떤 신념 앞에서도, 인간의 육체 자체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는 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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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

이대 해부학교실 초빙교수, 인하의대 명예교수, '인류의 전쟁이 뒤바꾼 의학세계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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