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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섭의 고려인청소년⑫] 다음 세대를 위한 꿈, 로뎀나무국제대안학교와 SK선경최종건재단의 동행

제주행 항공기를 타기 위해 김포공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앞 좌석부터 막심, 카밀라, 이리나, 김알렉세이 등. 새벽 5시 이른 시각에도 아이들은 설레기만 하다.

핸드폰의 진동과 함께 화면에 반가운 이름이 떠올랐다. 그런데 왜 이리 심장 박동수는 높아만 갈까.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그 짧은 찰나가 오래 잠들어 있던 내 심장을 깨우기에는 충분했다. SK선경최종건재단 박새롬 담당자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언제나처럼 따뜻하며 정중했다.

“로뎀나무국제대안학교 제주 수학여행 지원이 승인되었습니다.”
순간 숨이 멈췄다. 그 말이 귀에 닿자마자 내 심장은 먼저 섬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매년 가고 싶었지만 예산이 안돼 번번이 멈출 수밖에 없었던 제주. 계획서만 품에 안고 수십 번 쓰다듬었지만 끝내 펼쳐보지 못했던 평화의 섬 제주. 제주도 행은 늘 그랬다. 가고 싶지만 닿을 수 없던 섬. 매년 학생들에게 말로만 건네고 실제로는 보여주지 못했던 풍경. 박새롬 담당자의 말이 흐르는 동안 나는 이미 제주의 하늘을 이미 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어진 말이 나를 다시 정신 차리게 했다.

“제출해 주신 계획서대로 예산을 집행할 수 있으나, 먼저 선 결제해 주시면 영수증 기반으로 후 결산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SK 설립자 故 최종건 회장님의 뜻을 받들어 “아이들이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교육환경·문화환경·사회환경을 조성하겠다”는 최신원 이사장님의 약속이 우리에게도 기회로 다가온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금전 지원이 아니었다. 동시에 ‘당신이 감당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기대와 감사가 무게를 동반할 때 사람은 비로소 어른이 된다. 여행 비용은 재단이 부담하지만, 여행의 책임은 내가 지고 가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무거움은 나를 더욱 진지하게 만들었다. 누군가 짐을 대신 들어준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눌 파트너가 생겼다’는 감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책임의 중심에서 나는 하나의 기회를 보았다. 금전 지원보다 더 중요한 가치-아이들의 자율성과 창의, 그리고 결제가 끝난 뒤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체험의 진짜 교육적 출발점이 바로 그 문장 속에 들어 있었다.

재단에서 지원해준 전자칠판으로 제주도 지도를 그리는 아이들. 샤샤가 설명하는 것을 6명의 팀장들이 진지하게 듣고 있다. 사진 앞쪽은 필자 등 스탭진.

우리가 직접 실행하고 직접 증명해야 하는 여행.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내가 꿈꾸던 자기주도형 수학여행의 시작점이기도 했다. 나는 곧바로 기도로 방향을 틀었다. 감격이 큰 만큼 두려움도 컸다. 기도가 절실했다. 아이들의 가능성을 세상에 보여줘야 했고, 기회를 허락한 재단에 실망을 줄 수 없었다. 나는 지혜의 보따리를 간절히 구했다. 기도가 계획서를 완성하진 못하지만, 계획서를 붙잡는 손의 떨림을 잠재워 주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도록’이 아니라 ‘아이들이 감당해 낼 수 있도록’ 기도하기 시작했을 때 여행은 이미 내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 되어 있었다.

첫 번째 결정은 팀장 선정이었다. 6명의 팀장들에게 나는 질문 대신 제안을 던졌다. “너희가 가고 싶은 곳을 직접 찾아보고 우리가 갈 길을 스스로 그려보자.” 아이들에게 코스를 직접 설계하라고 했을 때, 그 눈빛 속에서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탐험의 빛을 보았다. 호기심의 떨림, 기대의 설렘이 뒤섞인 밝은 웅성거림. 가보지도 않은 제주의 섬을 상상으로 넓혀가던 눈빛들.

섬은 우리가 걸어갈 장소이지만 지도는 우리가 걸어갈 가능성이다. 그 가능성을 손에 쥐여주자 아이들은 더 이상 인솔 대상이 아니었다. 스스로 설계하는 탐험가이자 나의 여행 동지였다. 여행은 그 순간 이미 출발하고 있었다.

재단에서 지원해 준 전자칠판 덕에 우리는 칠판에 제주 사진을 띄우고 동선을 색깔별로 그릴 수 있었다. 그 장면을 잊을 수 없다. 서툴게 그린 선들은 뒤엉켜 있었지만 그것은 혼란이면서도 희망이었다. 섬 위에 그어진 길들은 방향을 잃은 듯했지만 마음들은 방향을 찾아가고 있었다. 보고 싶고 느껴보고 싶고 만져보고 싶었던 풍경들. 그 길 위에 실린 질문의 무게보다, 그 질문을 던지는 아이들의 에너지가 더 중요했다. 여행은 효율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감각으로 완성된다. 오감을 넘어 오감각으로 제주를 느끼는 여행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그때 생겼다. 제주 지도가 펼쳐진 전자칠판을 가운데 두고 오필준 부장선생님, 학교 운영이사이자 팀 프로젝트 담당 교사인 조현수 목사(구원의감격교회), 그리고 나는 아이들이 만든 지도를 보며 서로 다른 말을 하는 듯했지만 결국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좋은 경험이 될 거야.’ ‘조금만 더 다듬어주면 되겠어.’ ‘아이들이 가고 싶은 곳이 정말 많네.’ 그 말은 소리가 아니라 눈빛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난제-안전. 아이들이 자율 이동을 하면서 어떻게 보호의 시선 안에 둘 것인가. 그 고민은 나를 여러 밤 깨웠다. 이때 학생 관리를 맡고 있는 이서현 선생님이 한 줄기 빛을 건넸다. 위치추적 어플이었다. 실시간 위치, 이동 궤적, 배터리 잔량까지 확인할 수 있다는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감탄했다. 화면 속 작은 점은 정밀하게 움직였고, 배터리 잔량 숫자는 아이들의 피로까지 읽어내는 온도계 같았다.

중요한 것은 정확한 위치가 아니라 ‘정확히 보호받을 수 있다’는 안도였다. 이제 자유는 방임이 아니라 책임 안에서 허락받은 미션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대중교통을 교실로 삼기로 했다. 목적지까지 가장 빠른 이동 방식이 아니라, 가장 많은 질문을 하고 가장 많은 대답을 듣고 한국어를 연습하고 서로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이동 방식. 서툰 한국어는 극복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사용하며 익혀야 할 도구다. 버스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잠드는 체험이 아니라 정류장에서 질문을 던지며 눈을 뜨는 배움의 이동. 대중교통은 가장 느리지만 가장 안전한 교실이다. 안전은 속도가 아니라 예측 가능성과 상호 소통에서 나온다.

결제 방식도 철저히 자기주도형으로 설계했다. 팀장에게 체크카드를 준비하게 하고 각 팀이 체험 비용을 직접 결제하도록 했다. 영수증은 그날 저녁 결산 시간에 제출해야 하고, 분실 시 비용 처리가 되지 않는다는 규칙도 명확히 했다. 규칙은 냉정해 보이지만 사실은 책임의 훈련이다. 아이들이 자율을 받들며 동시에 책임 의식을 배우는 순간순간이 그들의 현실 감각을 키우는 리더 교육이 된다. 팀을 위해 애쓰는 결제 미션, 팀을 위해 챙겨오는 영수증 한 장의 무게. 여행의 증거는 비용이 아니라 성장의 기록이다.

호텔은 여전히 난제였다. 며칠을 예약과 취소로 지새웠다. 여행의 완성은 결국 ‘위치’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교통, 안전, 이동 동선, 단체 일정의 효율, 예산까지 모든 조건을 교육의 눈으로 골라야 했다. 그 급함 속에서 나는 아내에게 지도를 맡겼다. 그녀는 정확히 내가 바라던 좌표를 찾아냈다. 세미나실까지 무료로 쓸 수 있도록 이야기를 해두었다는 말에 그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역시 가장 가까운 동지가 가장 정확하게 안다. 학생 명단도 확정됐다. 3학년 학생을 우선으로, 수상 점수가 많은 학생들까지 포함해 최종 18명. 폴리나와 반 알렉세이의 간절함을 끝내 외면해야 했던 밤의 무게도 마음에 남아 있다. 그러나 감정으로 예산을 비울 수는 없었다. 다음 제주가 허락되는 날 가장 먼저 그 두 손을 잡아줄 것이라 약속했다.

내일, 여행은 진짜 출발한다. 새벽 5시 30분, 대절버스가 김포공항으로 아이들을 실어 나른다. 그러나 준비된 여행일수록 마지막 고비가 찾아온다. 누군가는 늦을 수 있고, 누군가는 변수를 들고 올 수도 있다. 설렘은 늘 불안과 함께 온다. 과연 우리는 모두 그 시간의 버스에, 우리의 꿈에, 함께 탈 수 있을까. 나는 다시 기도한다. 새벽의 어둠이 우리를 막지 않도록, 동트는 순간이 우리를 데려가 주도록. (계속)

소학섭

(사)청소년미래연구 이사장, 로뎀나무국제대안학교 이사장 겸 교장, 다문화전문가 2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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