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신현확, 격랑의 시대마다 닻이 된 사람…박정희·김재규·10·26 한복판에 서다

박정희 대통령(왼쪽)과 신현확 경제부총리

박정희에 맞선 신현확, 거목 쓰러지던 그 밤엔…

나는 우연히 소송을 맡으면서 신현확이라는 인물을 들여다보게 됐다. 그는 격랑을 일으키는 역사의 순간마다 시대의 닻 역할을 했다.

1978년, 박정희 대통령은 그를 경제기획원장관 겸 부총리로 임명했다. 그리고 국가의 경제팀이 확 물갈이가 됐다. 그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고도성장 일변도의 정책에 마침표를 찍는 건 아니었을까. 신현확 부총리는 고도 성장의 후유증이 극에 달한 한국경제에 곧바로 칼을 들이댔다.

1979년 초 첫 번째 충돌이 있었다. 청와대 본관 회의실에서 농가주택 개량 사업에 대한 보고가 진행되고 있었다. 신현확 부총리는 농가주택 개량 사업의 규모를 3만호로 잡았다. 내무부에서 올린 9만5천호를 대폭 줄인 것이다. 경제기획원 실무담당자가 챠트를 넘기며 대통령 앞에서 브리핑 중이었다.

“잠깐” 대통령이 보고를 중지시키고 신부총리를 보면서 말했다. “나도 농촌 출신인데 더 투자합시다.”

“각하, 재정 부담 때문에 축소가 불가피합니다.” 신 부총리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대통령의 표정이 굳어지면서 침묵이 긴 침묵이 있었다. 장내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어이 차트 다시 한번 넘겨봐.” 대통령이 브리핑을 하던 담당자에게 명령했다. 모두들 무슨 불호령이 떨어질까 겁을 먹었다. “그래도 6만 가구는 해야 되는 것 아니오? 어때, 부총리?” “안되겠습니다.”

신 부총리의 대답이 있자 사람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박 대통령은 무서운 눈빛으로 말없이 차트만 쏘아보았다. 넓은 회의실에 정적이 감돌았다. 이윽고 박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할 수 없구먼…”

1주일 후, 대통령이 다시 불렀다. “그 농가주택, 6만호로 합시다.” “이미 결정 났습니다.” “이건 내 통치철학이오!” 대통령이 책상을 쳤다. 신현확도 물러서지 않았다. “막대한 자금을 주택에 쏟으면, 공장 건설은 무엇으로 합니까?”

긴 침묵 끝에, 마침내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각 신문은 신 부총리를 ‘고집쟁이’라고 보도했다. 신 부총리가 찾아온 기자들에게 말했다. “옳은 것을 옳다고 하는 것은 ‘고집’이 아니라 ‘신념’이라고 해야 하는 거요.”

1979년 봄, 신 부총리는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가 관세청장을 불렀다. “지금 세계를 주도하는 것은 미국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 4국인데 미국과 일본에만 의존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야. 남북이 대치한 상황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강대국들의 각축 속에서 우리가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는 중국과 반드시 교역을 터야 해. 지금 중국은 달러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니까 자네가 중국측과 비밀리에 교섭을 해. 우리가 중국에서 석탄을 수입하고 그 대금을 달러로 지급하는 거야.”

중국과 외교관계가 없었지만 비밀교섭이 진행됐다. 석탄을 실은 배는 라이베리아 국적의 선박을 이용하고 그 배에 한국인 선주와 선원이 탑승했다. 항로는 일단 중국 하이난섬 부근의 공해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것으로 했다. 1979년 가을 중국의 첫 배가 석탄을 싣고 인천항에 도착했다. 관세청 직원들은 긴장했다. 발각되면 외교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그 배는 한국의 자동차 30대와 TV 100대를 싣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신현확의 북방외교가 얻은 첫 결실이었다.

그해 10월 모든 것이 멈췄다. 26일 밤 10시 30분경이다. 신현확 부총리는 국방부에서 긴급 국무회의가 있다는 사실을 통보받았다.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전시가 아닌데 국방부에서 국무회의가 열린다니. 그는 11시경 국방부 청사에 도착했다. 무장한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복도에서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의 긴장된 표정은 단순한 상황이 아님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복도에 서 있던 김성진 문공부장관이 그를 보자 빠르게 다가와 속삭였다. “대통령께서 무슨 이상이 생긴 것 같은데 김재규 정보부장이 알고 있으면서 말을 하지 않고 자꾸만 계엄령을 선포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가 국방장관실로 들어갔다. 최규하 총리가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 앉아 있고 그 옆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 그리고 불려 온 장관들이 앉아 있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시급히 비상계엄령을 선포해야 합니다.” “갑자기 웬 비상계엄입니까?” 신현확이 물었다. “각하가 지금 유고 상태입니다. 이 사실을 김일성이 알면 큰 일 아닙니까? 보안을 유지하면서 빨리 계엄령을 선포해야 합니다.” “유고? 그 내용이 뭡니까?”

신현확이 최규하 총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총리는 입을 봉한 채 석상처럼 앉아 있었다. “유고의 내용이 뭡니까?” 이번에는 김재규에게 직접 물었다. “그것은 밝힐 수 없습니다. 비밀입니다.” 김재규의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살기가 돌았다. 회의실에 침묵이 흘렀다. 모두가 위축되어 있었다.

“밑도 끝도 없이 계엄이라니?” 신현확이 탁자를 쳤다. “국무위원이 대통령 유고의 내용도 모르고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게 말이 됩니까? 나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아니 선배님, 그게 아니라…” 김재규가 한풀 죽었다. 그의 얼굴에는 땀이 번들거리고 목소리에는 초조함과 짜증이 배어 있었다. “글쎄 유고내용을 자세히 밝히라니까요” 순간 김재규의 표정이 돌변했다. “거 다 알 만한 분이 왜 이렇게 따지고 듭니까?”

무장한 정보부원들이 주위에서 서성이고 김재규도 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공포 분위기였다. 그가 분위기에 눌리지 않고 맞받아쳤다. “대통령의 신상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야겠소. 확실히 말하시오. 돌아가셨소?”

김재규의 눈빛이 흔들렸다. “돌아가신 거요?” “…….” 김재규의 침묵은 긍정이었다. “어떻게?” “더 이상 묻지 마십시오. 보안이 유지되야 합니다.” “보안은 무슨 보안?”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 침묵하던 최규하 총리가 입을 열었다. “다들 아시겠지만 대통령의 유고입니다. 비상계엄령 선포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

신현확이 최규하 총리에게 반박했다. “무엇을 근거로 대통령이 유고입니까? 우리 국무위원 중에 시신을 본 사람이 있습니까?”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소리쳤다. “나는 내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해야겠습니다.” 어떤 직감이 왔다. 그의 기에 눌려 김재규는 더 이상 협박하지 못했다. 그가 병원으로 가기 직전이었다. 거기 있던 국방장관에게 다가가 귀엣 말을 전했다. “아무래도 김재규 부장이 대통령 서거와 관련이 있는 것 같소. 헌병대를 동원하든지 해서 일단 체포하는 게 좋겠소.”

국방부를 떠난 그가 중앙청 옆 서울지구병원에 도착한 것은 새벽 1시를 넘긴 시각이었다. 병원 구석의 작은 방으로 안내되었다. 진료용 침대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흰 천으로 덮인 시신이 놓여 있었다. 그가 머리를 덮은 흰 천을 천천히 걷어냈다.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

거목이 쓰러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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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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