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유준열(국악신동 태평양 부친) 영전에 바침

故 유준열 원장

유준열 원장님

기묘년을 하루 남긴 31일 새벽 한 통의 문자메시지가 전달됐습니다.

“[부고] 유준열 별세 정읍아산병원 장례식장 102호 발인 2012년 1월2일 유태평양 올림.”

원장님을 처음 만난 것은 2005년 10월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아시아기자협회 총회 개막식장에서였지요. 당신이 그렇게 애지중지한 ‘국악신동’ 태평양군의 축하공연을 기부해주신 덕택이지요. 그후 흐른 6년간 섣달 그믐께나 추석 무렵 전화 통화로 안부를 묻는 게 고작이었지만, 우린 꽤나 인간적인 신뢰를 쌓아갈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비슷한 연배로 비슷한 시대를 살아왔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이따금 만나도, 늘 웃음을 잃지 않던 당신 모습을 이승에선 더 이상 볼 수 없다니 이 무슨 말입니까? 올초 태평양이 전북대에 입학했다고 전화하여 기뻐하던 목소리가 아직 쟁쟁한데…작년 늦여름 서울대 음대에 응시해 결과를 기다린다며 별로 자신 없어 하던 음성에 얼마나 미안했는지 아십니까? 유 원장님. 서울대가 아무래도 유망한 천재국악인을 뽑을 것 같지 않다는 ‘불길한’ 예감을 저도 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사실 태평양군은 잘 알려져 있지만, 당신에 대해선 아는 게 별로 없었음을 고백합니다. 오늘 새벽에서야 인터넷 조회를 통해 당신의 이 세상에서의 삶을 찾아 당신의 생전을 회고하려 하니 너그러이 받아주십시오.

작년 1월25일 뷰티플래너란 블로그는 ‘영재 자녀를 키워보니’란 기획에서 첫 번째 주인공으로 당신을 꼽았더군요. 몇 대목을 같이 보십시다.

유태평양

<<“제비 몰러 나간다~”라는 유행어를 탄생시켰던 ‘유태평양(18)’군. 6세에 ‘흥보가’를 완창해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국악 신동이다. 유군의 뒤에는 아버지 유준열(52)씨의 헌신이 있었다. 34살 늦깎이로 국악을 시작했던 유씨는 작은 꿈이 하나 있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밤 새는 줄 모른다고, 딱 내 모습이 그랬죠. 자식에게도 국악 공부를 시키고 싶었어요. 국악 가족, 멋있지 않아요?” 유씨의 특별한 국악교육은 유군의 태교부터 시작됐다. 태어나서도 판소리와 사물놀이를 자주 들려줘 국악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했다. 꽹과리와 북 등 국악기가 아이의 장난감이 됐고 국악공연장은 놀이터가 됐다. 유씨의 스승이었던 조통달 명창의 집에도 자주 들러 흥겹게 같이 놀며 소리를 듣게 했다. “처음엔 작은 꿈 같은 것이었어요. 그런데 첫 돌을 갓 지난 아이가 냄비뚜껑으로 1시간 넘게 국악 장단을 맞추는 것을 보고 놀랐죠. 그때부턴 조금 욕심이 생기더군요. 하하.” 그는 특히 어린 유군이 즐겁게 소리를 할 수 있도록 신경 썼다. “공연을 흥겹게 즐길 줄 알아야 제대로 소리가 나와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아이에게 억지로 시켜서는 절대 재미를 붙일 수 없죠.”

유씨는 처음부터 유군을 판소리꾼으로 가르친 것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음악적 영감’이었다. 판소리를 하되, 판소리 외의 다양한 음악을 접할 수 있도록 교육했다. “어른들도 똑 같은 일을 반복하면 지겨워 한다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타악기, 서양음악, 기타와 드럼 등 음악에 구분을 두지 않았어요.” 당시엔 유씨의 고민에 대해 상담할 수 있는 전문적인 교육기관이 없었다. 유씨는 직접 발품을 팔기 시작했다. 타악기 스승으로는 최상진(전남도립국악단원)씨, 드럼 스승은 최소리(SBS드라마 ‘장길산’ 음악감독)씨 등 그 분야 최고의 스승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유씨는 자신의 역할을 ‘영양조리사’로 표현했다. “어느 특정 분야만을 고집했다면 쉽게 흥미를 잃었을 것 같아요. 부모는 단지 안내자의 역할을 할 뿐이라고 생각했죠.” 유군에게 판소리를 가르치되 판소리에만 갇히지 않도록 유연한 생각을 가질 기회를 만들었다….(중략)

유씨에게도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하는 시기가 있었다. 바로 유군의 슬럼프 때문이었다. “초등 5학년을 지나면서 변성기가 찾아왔어요. 아마 아이에게 그 때가 가장 힘든 시기였을 겁니다. 어린애의 목소리를 벗어나 어른의 목소리를 찾아야 하는 시기였으니까요.” 유군에게 휴식을 주면서도 ‘음악적 영감’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유학이 묘안으로 떠올랐다. “인도 순회공연 중 타악기 공연에 감명을 받은 아이에게 타악기 본 고장의 음악을 가르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또 영국식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죠.” 유군은 케이프타운의 론데보쉬 중학교에서 4년간 ‘젬비(아프리카 전통 타악기)’를 공부하며 오케스트라 활동도 겸하는 등 다양한 음악을 접했다. 유씨는 유학을 결정하는 과정에 유군의 의견이 적극적으로 반영될 수 있도록 주의했다. 유학갈 나라부터 학교까지 모든 것을 상의하고 결정했다.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해선 유군 스스로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학 후 ‘이제는 판소리를 제대로 하고 싶다’는 말을 했어요. 그저 국악을 좋아만 했던 어린 애가 프로의식을 갖춘 국악인이 된 거죠. 어른의 소리를 찾아가는 첫 발걸음을 제대로 뗀 셈입니다.”>>

유 원장님

당신이 박노해 시인과 오랜 인연이 있다는 사실 역시 오늘에서야 알았지요. 그는 2000년 당신이 낸 <소리하는 아이 장단치는 아빠> 책 서문에 이렇게 적고 있더군요. 어느새 눈물이 맺힙니다.

<<…(전략)판소리라는 것이 오랜 세월의 수련과 피나는 독공, 무엇보다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이 필요한 것이라는 점을 알기에 유태평양 군의 출현은 예사롭지 않은 일이었다. 나와 태평양군의 아버지는 고교 시절, 유신독재 정권이 한창일 때, 함께 민주화를 열망하며 호형호제하며 사이였다. 태평양이 일찍이 국악의 재능을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아이의 천재성을 발견한 부모의 정성과 스승이신 조통달 선생님과의 만남, 그리고 태평양 군의 무서운 열정과 노력의 결과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상 깊은 것은 우리 조상의 전통태교에 따라 엄마뱃속에서부터 정악, 사물놀이, 국악가요 등을 꾸준히 들려주고 육아방법도 서양의 많은 이론들보다 토종 한국식 교육을 접목시켜려 애쓴 태평양 부모의 지성어린 노력이었다…(후략)>>

저도 2006년 한겨레신문에 태평양과 인터뷰한 적이 있지요. 기억 나시지요?

몇 대목 인용하지요.

<<…(전략)국악의 세계화를 코앞에 두고 아들을 세계 타악의 본고장인 남아공에서 공부시켜야겠다고 아버지 유준열(48·국악인)씨가 생각한 것이다. 여기에 영어 실력을 갖추지 않고선 세계적인 음악가로 성장하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보태졌다…(중략) “영어는 재밌는데 독일어 같은 아프리칸스는 너무 어려워서 솔직히 싫지만 필수과목이라 어쩔 수 없지요, 뭐.” 유군은 이곳서도 음악 공부가 제일 좋다고 했다. “젬베라고 여기 타악기가 있어요. 제가 아주 잘 친다고 선생님이 칭찬했어요. 저더러 베스트 제자라나요. 하루 1시간 정도 해요. 드럼도 잘 치는데 집에 드럼세트가 없어서 학교에서 연습해요. 판소리는 시간 나는 대로 하는데 선생님이 없으니 어떡해요. 저 혼자 연습하죠. 그리고 동생하고 게임 몇번 하다 보면 하루가 금세 지나가요.”…(하략)>>

유 원장님.

남기고 간 두 아이 걱정 말고 그곳에서 편히 쉬십시오. 태평양의 소리가 이제 아빠의 정성과 기도를 받아, 오대양육대주를 타고 넘을 그날이 머지 않을 것입니다.

영면하소서, 이땅의 영원한 국악인 유준열님이시여.

2012년 둘째날 이상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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