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2일] 일본, 필리핀 마닐라 점령

2007년 남아공 윈프리 여학교 개교

”나도 여러분과 같은 나이에 물도 전기도 없는 외할머니 집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하지만 적어도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 지금의 내가 되는 데 아주 중요했다.”

미국 토크쇼의 여왕으로 불리는 오프라 윈프리가 지난 2007년 1월2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수도 요하네스버그 북쪽의 작은 도시에 자신의 이름을 딴 ‘오프라 리더십 아카데미’ 여자학교 개교식장에서 한 말이다.

그녀가 4000만 달러를 들여 세운 이 학교의 첫 입학생 152명 모두는 11~12세의 남아공 극빈 가정 출신 어린 여학생들로, 전액 무료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호텔 같은 28개 건물에 현대식 교실과 과학실험실, 도서관과 극장, 헬스센터까지 갖추고 모든 학생은 스위트룸 수준의 기숙사에서 생활하도록 했다. 한때 교칙이 너무 엄하다는 논란이 있었다.

그녀 자신이 18세의 미혼모에게 태어나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집이 너무 가난해 감자 포대로 지은 옷을 입고 다녔다. 9세 때 사촌에게 성폭행 당하고 14세에는 미혼모가 됐으나 2주 만에 아이를 잃었다. 오프라 윈프리는 2001년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과 만나 이 학교를 짓기로 약속했고, 그것을 지킨 것이다.

2012년 현재 오프라 윈프리는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흑인 여성이다. 그녀가 진행하는 ‘오프라 윈프리 쇼’는 미국에서만 4900만 명이 시청하고 121개국에서 방영됐다. 경제지 ‘포브스’는 재산이 15억 달러인 윈프리를 2004년부터 3년 내리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흑인여성 억만장자’로 꼽았다. 흑인, 사생아, 성폭행, 가난 등 최악의 환경을 딛고 일어선 입지전적인 인물인 것이다.

포브스가 팬의 규모, 언론의 관심 등 모든 것을 종합해 선정한 ‘최고의 여자 스타 100인’ 중에도 오프라 윈프리가 1위로 뽑혔다. 2012년 1월 현재 알려진 그녀의 한 해 수입은 3억1500만 달러다.

2001년 중국-타이완 직항로 개통

2001년 1월2일 중국과 타이완 사이의 직항로가 반세기 만에 개통됐다. 1949년 이후 단절됐던 중국과 타이완의 직항 바닷길이 이날 52년 만에 다시 열린 것.

직항은 타이완의 마조도-금문도 2개 섬과 중국의 복주-하문 2개 항구 사이에 개설됐다. 이로써 양안간에 직항, 무역, 우편을 허용하는 이른바 ‘소3통’이 1949년 이후 처음으로 공식 실현됐다.

타이완 관리 등 190명을 싣고 진먼항을 출발한 ‘타이우’호가 6km 정도 떨어진 중국 푸젠성 샤먼항에 도착했다. 타이완 주민 500여 명을 태운 ‘타이마’호도 비슷한 시각 중국에 무사히 입항했다.

타이완 국민당 정부는 1949년 공산당 정부와의 내전에서 패해 타이완으로 쫓겨난 후 대륙과의 ‘3통’을 금지해왔지만, 천수이볜(陳水扁) 타이완 총통은 ‘소삼통(小三通)’을 주창, 전면 실시에 앞서 우선 중국과 인접한 일부 섬들에 한해 3통을 실시하자고 중국에 제안했고, 중국도 이를 받아들였다.

1942년 일본, 필리핀 마닐라 점령

일본군은 1941년 12월8일 진주만 공습이 있은 후 몇 시간 뒤에 필리핀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이듬해(1942년) 1월2일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를, 5개월 뒤에는 필리핀 전역을 점령했다. 침략자 일본은 “사악한 서구 제국주의의 속박에서 필리핀을 해방시키고, 사회적 변화를 촉발시키려고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대동아 공영권의 구도 아래 필리핀을 포함해 새롭게 점령한 영토들에서 경제적·정치군사적·사회문화적·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잡으려는 야심을 실행에 옮기고 있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1945년까지 일본점령 기간 필리핀은 역사상 가장 불운하고 고통스러운 시기 가운데 하나였다.

필리핀 국민들의 저항이 거세지던 1943년 10월에 일본은 기만적으로 필리핀 독립을 인정하고, 위성정부(필리핀 제2공화국)를 수립했다. 그러나 필리핀 제2공화국은 일본의 ‘위성정부’로, 사실상의 통수권은 일본군에 있었고,?필리핀인들은 일본군 통제에 따라야 했으며 일본 당국은 필리핀의 헌법을 초월했다.

태평양전쟁의 후기 국면이라고 볼 수 있는 1944년 중반 이후 미군은 전쟁 초기에 빼앗겼던 지역들을 탈환하면서 일본군의 목을 조여 나갔다. 그것은 필리핀으로 향하는 공격로를 장악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1944년 10월 20일 맥아더 지휘로 미군이 레이테 해변에 상륙했다. 이어 민도로, 바탕가스, 링가얀 등으로 연이어 상륙이 전개됐다.

1945년 2월3일 미군은 마닐라를 탈환했다. 같은 해 8월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unconditional surrender)을 선언했고, 마지막으로 9월 2일에 도쿄만에 정박하고 있던 미주리호 함상에서 ‘무조건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