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갯속’ 태국 정국 어디로 가나

정치적 갈등과 시위, 폭력사태로 얼룩진 태국 정정불안이 석 달째 계속되고 있다. 현정부 퇴진과 정치개혁 구호를 외치는 시민들이 호루라기를 목에 걸고 태국 삼색기를 휘날리며 시내를 행진하는 모습이 연일 세계 언론에 보도된다. 반정부 시위대의 선거 보이콧 속에 총선이 치러졌지만 정국 향배는 여전히 안갯속이다.

이 정치갈등의 중심에는 탁신 친나왓이란 인물이 있다. 2001년 태국경제 부활이란 시대적 사명 속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이른바 ‘CEO 총리’로 선출되고 2005년에는 문민정부 사상 최초로 절반을 훨씬 넘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승리한 탁신. 그러나 부정부패 혐의로 반탁신 시위가 심화되면서 2006년 군부에 의해 축출된 뒤 여동생이 총리로 있는 현재까지 외국을 떠돌며 망명생활을 하고 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반정부 시위의 시발점은 바로 이 탁신 전 총리를 포함한 정치범 사면법안이다.

태국에서는 입헌혁명이 있었던 1932년 처음 사면법이 시행된 이후 정치범·사상범을 대상으로 수십 차례 사면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거론된 사면법이 국민 다수의 반대와 지탄의 대상이 된 것은 그 배후에 탁신 전 총리가 있다는 의혹 때문이다. 사면법(amnesty bill)은 애초 2006년 군부쿠데타 이후 심화된 속칭 ‘레드셔츠(쓰어댕, 탁신 전 총리 지지세력)’와 ‘옐로우셔츠(쓰어르엉, 반탁신 보수세력)’ 갈등을 불식하고 화합을 이루기 위해 관련자 혐의를 모두 사면한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여러 차례 심의를 거치면서 탁신 전 총리와 측근들의 비리 혐의를 포함하는 이른바 ‘포괄적 사면안’이 새벽 4시 하원 의회에서 ‘날치기 통과’되면서 야당과 시민들이 분노했다. 특히 평소 정치적 색깔을 드러내지 않는 ‘팔랑응이얍(조용한 세력)’ 시민들이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침묵하던 태국인 지식인들이 정치적 견해를 적극적으로 표명하고 민주주의를 위해 행동하는 모습을 보였다.

급작스러운 상황 반전 속에 상원은 사면법을 만장일치로 부결시켰고, 여당 의원들은 이 법안을 재상정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공식 발표했다. 하지만 시위대의 분노는 정부 퇴진을 요구하는 대대적인 반정부 시위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방콕의 중산층과 지식인, 그리고 남부 주민들이 주류를 이뤘다.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지원금이나 물자를 기부했다. 시위대를 이끄는 쑤텝 트억쑤반 전 의원(아피씻 웨차치와 정부 시절 부총리)은 ‘룽깜난(면장 아저씨)’으로 불리며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그는 실제로 고향인 남부 쑤랏타니에서 미국대학 석사 소지자로서 처음으로 면장을 지낸 이력이 있어 ‘면장’으로 통한다고 한다. 내뱉은 말은 지키고 신의를 중시한다는 대장부 이미지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시위대의 압박 속에서 잉락 친나왓 총리가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총선을 선언했지만 시위의 열기는 가라앉을 줄 모르고 치솟았다. 100만 명이라는 사상 최대 규모 시위대가 거리를 행진하는 장관을 연출하게 된 데에는 쑤텝의 대중적 인기가 한몫한 것이 사실이다.

총선을 앞두고 태국 정부는 1월22일 60일간 비상사태를 발효했지만 시위대의 행진과 공공기관 점거 시위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일부에서는 군경과의 충돌로 1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총선 당일인 2월2일 시위대가 선거장 입장을 방해하는 등 9만3000여 개 투표소 가운데 1만 개 이상 투표소에서 투표가 취소됐다. 투표율은 역대 선거에 한참 못 미치는 약 46%. 그나마도 지역별 분포를 보면 50% 넘은 곳은 대부분 북부와 동북부 지역에 밀집돼 있고, 방콕과 남부 지역은 30%에도 미치지 않은 낮은 투표율을 보였다. 2월23일 투표가 취소되었던 선거구에서 추가선거가 예정돼 있지만 개표 결과 탁신계 정당이 또 다시 승리하더라도 시위대가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고 해산할 것 같지 않다. 야당 의원들은 선거 부정과 선거절차 위반 등을 들어 조기총선의 위헌과 전면 무효화를 주장하고 있다.


갈등의 핵심은 탁신 전 총리

그렇다면 반정부 시위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시위대는 선거 이전에 정치개혁과 국민의회 구성이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헌법에 명기돼 있지 않은 과도의회 격인 ‘국민의회’라는 기관을 누가, 어떤 방식으로 구성할 것인지 구체적인 대안이 불분명하며, 이것 자체가 위법이고 비민주적이라는 비판도 있다. 그럼에도 야당이 선거를 보이콧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방콕과 중부 지역 중산층 및 남부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야당이 북부와 동북부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탁신계열 정당과 대결할 때마다 상대적 수적 열세로 매번 참패를 맛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거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정권 야욕을 채우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일각에서는 혼란사태 장기화가 군부 쿠데타에 정당성을 마련해 주려는 숨은 의도라는 음모론이 제기되고 있다. 물론 군의 개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1932년 이후 군부 쿠데타가 18차례 있었고, 탁신 전 총리를 축출한 2006년 9월 쿠데타 당시 많은 시민들이 혼란상황을 해결해 준 군을 반겼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양쪽에서 ‘서로 다른’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또 다시 군이 해결사로 등장해 민주주의 후퇴로 시위가 마무리되는 것만큼 국제사회에 부끄러운 일도 없음을 많은 시민들이 자각하고 있다.

또한 군의 개입은 잠자고 있는 친탁신 레드셔츠들을 자극해 오히려 혼란이 가중되는 최악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최근 핵심 군 장성들이 현 상황 타개를 위한 회동을 가진 사실은 쿠데타든, 다른 형태의 어떤 조치이든 군부의 움직임을 주시하게 한다.

태국 재무부는 올해 경제성장률 예상치를 2%대로 하향 조정했다. 장기적 혼란상황이 관광대국인 태국 경제에 칼바람을 몰고 올 것임은 자명하다. 벌써 몇 년째 출구가 보이지 않는 혼란 속에 정체돼 있는 태국. 쌀 수매 정책 실패와 부정부패 혐의 등으로 궁지에 몰려있는 정부. 장기화된 시위로 지치고 눈에 띄게 규모가 축소된 반정부 시위대. 조금씩 움직임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새로운 인물의 등장. 과연 드라마틱한 상황 반전이 있을지 지켜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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