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와 고백’ 민주화주역 김근태 잠들다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30일 새벽 5시31분 6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김 고문은 ‘민주화 운동의 대부’ ‘또하나의 바보’ ‘민주화 운동 큰 형님’ 이라고 불리며 재야운동과 한국정치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김 상임고문은 수년째 파킨슨병을 앓아온 데 이어 지난달 29일 뇌정맥혈전증으로 서울대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으나 2차 합병증이 겹치면서 패혈증으로 한달 만에 숨을 거뒀다.
김 고문은 1965년 대학 입학 후부터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다. 1967년 서울대 상대 학생회장 때 총선·대선 부정선거 항의집회를 하다 제적당해 군대에 강제징집 됐다. 1970년 복학했지만 이듬해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에 연루, 지명수배됐고 이때부터 1979년 10·26사태 때까지 도피생활을 했다.
김 고문은 1983년 첫 공개적 민주화운동 조직인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해 1985년 투옥될 때까지 두 차례 의장을 맡았다. 당시 민청련의 상징은 두꺼비였다. 두꺼비가 뱀에 잡히면 죽지만 그 뱀도 두꺼비 독이 퍼져 죽고 이후 두꺼비 새끼들이 그 속에서 뱀을 자양분으로 새롭게 성장하듯 민주주의를 위해 탄압받는 것은 이를 꽃피우기 위한 희생으로 여겼던 것이다. 김 고문은 당시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분실로 끌려가 ‘고문기술자’ 이근안 경감 등에게 보름 가까이 “스스로 죽고 싶었다”고 말할 정도로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받았다. 고문 후유증이 파킨슨병으로 이어진 것으로 전해졌다.
김 고문은 1987년 악몽같은 고문 경험을 <남영동대공분실>이라는 책으로 펴냈고, 미국 로버트케네디 인권상을 부인 인재근씨와 공동 수상했다. 김 고문은 자신을 고문했던 이근안 경감에 대해 감옥으로 찾아가 용서를 했다.
김 고문은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활동을 하다 또다시 구속돼 1992년까지 감옥생활을 했다. 1994년 그는 제도권정치로 눈을 돌려 민주자유당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결집하는 민주연합정당을 만들기 위해 출범한 통일시대민주주의국민회의 공동대표를 맡았다.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로 2년 뒤 대통령에 당선한 김대중 총재와 손잡고 본격적인 정당생활을 시작했다. 1995년 10월 에드워드 케네디가 당시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 김 고문의 사면복권을 요청해 김 전 대통령이 이를 수용했다는 일화가 있다.
김 고문은 1996년 15대 총선에서 서울 도봉갑에 출마해 2004년 17대 총선까지 연속 3선을 했다.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때는 불법 정치자금에 대한 양심고백을 하며 중도에 경선중단을 선언한 적도 있다.? 2004년 총선 때 열린우리당이 과반의석을 확보한 이후 정동영 의원과 함께 열린우리당의 양대 계파 수장으로 자리매김해 재야 및 486 운동권 출신 의원들을 중심으로 한때 ‘GT계’를 형성했다.
2004년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입각해 한때 행정부 경험을 쌓았다. 2006년 5·31 지방선거 참패 이후 “스스로 독배를 들겠다”며 당의장을 맡아 당을 진두지휘했다. 하지만 참여정부 후반기로 갈수록 정권에 대한 민심이반이 심해지면서 열린우리당을 되살리기에는 버거웠다. ?2007년 열린우리당 후신인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 경선 때 그는 또다시 기득권을 버리고 범여권 대통합과 오픈 프라이머리(국민경선) 실현이라는 대의를 위해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김 고문은 2008년 18대 총선에 나섰지만 낙선했다.?
김 고문은 지난해부터 원외에서 민주진보 대연합을 위한 활동을 벌여왔다. 내년 총·대선에서 민주당이 승리하려면 진보정당과 시민사회 등 모든 세력이 참여하는 ‘반(反)보수 대연합’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입원 치료 중인 지난 8일, 이틀 후 예정된 딸 결혼식에 참석 못할 상황에 처하자 억측을 피하기 위해 파킨슨병 투병 사실까지 공개하며 재활 의지를 다졌지만 결국 합병증이 겹쳐 세상을 이겨내지 못했다.
유족은 부인 인재근씨와 1남1녀(병준·병민)가 있다. 빈소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