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튜터’와 ‘퍼실리테이터’의 차이
10여 년 전 뉴질랜드에 살 때 자원봉사를 한 인연으로 시티 카운슬(City Council) 산하 장애자 재활기관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할 기획을 얻었다. 이 복지기관은 지적, 정서적, 사회적응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서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정서 장애자를 위한 미술프로그램을 맡아 지도하게 되었다.
나는 당연히 교사, 즉 ‘튜터(Tutor)’로 일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 기관에서는?내 직책과 역할을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라고?규정지어 주었다. 뭔가 정체성(identity)이 불분명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내심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퍼실리테이터의 역할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체험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다. 사람들에게 뭔가를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지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이 뭔가를 시도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바로 내 역할이었다.
수업을 듣는 사람들은 모두 성인들로서 신체적으로는 건장해 보였지만 대부분 정서와 지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주의가 산만하거나 항상 뭔가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는 두 가지의 이상의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그들을 위해 매주 상상화, 정물화, 인물화 그리고 생일카드, 공예작품 만들기 등 매번 다른 프로그램과 그에 따른 다양한 재료들을 성의껏 준비했다.
그럼에도?수업 방향과 관계없이 항상 자신이 좋아하는 소재에만 집착하는 행동양식을 보이는 사람들이 상당수?있었다. 예를 들면 어떤 청년은 수업시간마다 매번 축구공만을 그리고, 어떤 아가씨는 매번 유명 메이커의 화장품만을 그렸다. 심지어 잡지나 신문에서 다양한 그림을 찾아오려 붙이는 콜라주(Collage) 작업을 하는 날에도 여전히 그 청년은 스포츠 잡지에서 또 축구공만 찾아내 오려 붙이고, 그 아가씨는 여성잡지에서 화장품 광고만을 뜯어서 붙이는 것이 아닌가!
그들이 집착하고 있는 것들을 그림을 통해 해소하려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마음껏 작업하도록 한동안 조용히 지켜보았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걸까? 그들을 계속 제자리에 머물러 있게 하는 것은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 탓이다. 또 고정관념의 세계에 갇혀서 다른 것을 전혀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과 같은 현상을 내면에 갖고 있는 것이 문제의 요인임을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다. 순간 수업의 방향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새로운 시도에 대한 두려움을 완충시켜 한 단계씩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들이 집착하는 것을 기초로 하여 사고의 영역을 확대시켜 주는 것이 가장 빠른 길임을 알게 됐다. 그래서 항상 축구공을 그리는 청년에게는 축구에 관련된 모든 것을 그릴 수 있도록 축구화, 트레이닝복, 축구장, 축구선수의 사진과 포스터를 준비해 주었다. 그리고 매일 화장품을 그리는 아가씨에게는 여러 가지 기하학적인 형태의 화장품용기와 자신만의 브랜드와 로고를 디자인 할 수 있도록 각종 자료를 모아주었다.
음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각종 악기와 음악 CD 등을 보여주고 들려주면서 그들의 흥미를 존중해 하며 대화를 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조금씩 알려주니 그들은 수업에 보다 열심히 집중하게 되었고, 그들 스스로가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서 넓은 세계로 한걸음씩 나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맞춤식으로 진행한 내 미술수업에는 수강생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그들은 수업을 통해 각기 다른 자신의 모습들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게 되어 자신감과 자존감을 조금씩 회복하게 되었다. 학기말에는 그들 생애에 기억에 될 작품 전시회를 열어 많은 축하객들로부터 갈채를 받았다.
그런데 문득 어느 날 내 자신 안에도?’축구공’과 ‘화장품’같은 강한 집착을 그들처럼 똑같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바로 자녀의 ‘우수한 성적표’와 ‘상장’같은 것에? 대한 집착이었다. 내 자녀만이 가진 선한 성품이나 귀한 재능들을 인정하지 않고 표면적인 것들에 집착하는 내면의 장애를 가진 부모의 모습의 내 스스로 보게 된 것이다.
부모의 역할은 일방적으로 지식이나 기술을 가르치는 튜터가 아닐뿐만 아니라 자녀는 결코 나의 기대를 채워주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녀에게 용기를 주고 격려를 하며 일방적인 지시가 아닌 진정한 소통을 시도하며, 그들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건강하게 이끌어 갈 수 있도록 좋은 퍼실리테이터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이 바로 부모의 진정한 역할이라는 사실이라는 것을 마음 깊이 깨닫게 되었다.
*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 : 어떠한 일이나 관계를 용이하게 하는 사람, 촉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