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 청소년 상처, 법원이 어루만져

2012년 8월 몽골 고비사막에서 열린 ‘힐링캠프’. 더위에 지쳐 있던 아이들이 카메라를 향해 미소짓고 있다. <사진=명성진>

본드흡입 중독자 그룹홈 ‘세품아’ 이야기

보통 처벌하는 곳으로만 생각하는 법원이 사회를 밝게 할 수 있는 여러 활동을 하고 있음을 한 사례를 통해 전하고자 한다.

춘천지방법원에서 2년간 소년 단독재판을 맡았던 심재완 판사는 지난해 2월 인천지방법원으로 옮기면서 다시 소년 단독을 지원했다. 변화의 가능성이 있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소년보호재판의 보람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춘천에서는 볼 수 없던 유해화학물질관리법 위반 사건, 즉 ‘본드 흡입’ 사건이 자주 눈에 띄었다. 2010년 이후 인천지역 본드 흡입 사건 수를 확인해보니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소년 재판은 형사처벌보다 보호처분이 목적이다. 아이가 왜, 어디서 본드를 마셨고, 어떻게 막을 수 있는지 고민해야 적절한 처분을 할 수 있다. 심 판사는 본드흡입 청소년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보호자 없는 아이들을 위탁 받아 그룹홈 형태로 생활하는 명성진 목사를 알게 됐다. 지난해 ‘신병인수 위탁보호위원’으로 지정 받은 명 목사는 2008년부터 ‘세상을 품은 아이들(세품아)’을 구성해 본드에 중독된 부천지역 아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이들이 중독에서 벗어나도록 돕고 있었다.

본드 상자째로 사 마시는 아이들

아이들이 선호하는 ‘○○코크’는 철물점이나 인터넷에서 개당 1500원 이하 가격에 판매된다. 어떻게 샀냐고 물어보면 “1개면 하루 종일 (흡입)할 수 있어요. 누가 한 개씩 사겠어요? 싸니까 보통 한 상자씩 사요”라며 천진하게 대답한다. 편의점에서 음료수 사 마시듯 손쉽게 본드를 구입해 환각 속에서 힘든 현실을 잊고 지내려는 아이들이다. 법정에서 “본드 좀 그만 마셔라”고 한마디 던진들 소용없는 일이다.

공업용 본드로 분류돼 있는 ○○코크는 환각성 물질인 ‘톨루엔’ 함량이 높아 ‘청소년유해약물’에 해당한다. 19세 미만에게 판매는 불법이고, 제품에도 표기돼 있지만, 청소년에게 담배나 술이 판매되는 것처럼 단속이나 처벌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본드흡입을 막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인천지방법원 소년부는 관련기관들과 함께 수 차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지난해 9월에는 인천지역 철물점 360곳에 청소년들의 본드흡입 현황과 폐해를 알리는 공문을 보내 청소년에게 본드를 팔지 못하도록 계도했다. 이어 10월 심 판사는 최성학 인천보호관찰소장과 함께 ○○코크의 제조회사를 방문해 인천에서는 일시적이라도 ○○코크를 판매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또한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기술표준원을 방문해 아이들이 손쉽게 본드를 구입할 수 있는 현실에 대한 대책 마련을 요구했으며, 그 해 12월 소년부 판사와 법원 직원들을 포함해 보호관찰소, 시민사법위원회, 범죄예방위원회가 함께 인천 주안역 앞에서 본드흡입의 심각성을 일깨우는 전단지를 나눠주고 철물점을 방문해 청소년에게 본드 판매의 위험성을 알렸다. 이처럼 법원이 적극적으로 문제의 원인을 조사하고, 거리 캠페인까지 벌이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소년보호재판의 목적이 소년의 환경조정과 성향조절을 통한 선도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올 2월 심재완 판사 후임으로 소년보호재판을 담당하게 되면서, 업무 파악도 하기 전에 여러 기관에서 연락이 왔다. “이런 아이가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어떤 아이가 요새 처분을 이행하지 않는데 다른 처분으로 변경하는 것이 가능할까요?”라는 개별사건 문의부터 소년재판 관련 각종 제도와 관련된 문의, 당장 진행할 행사들에 대한 준비회의까지.

우선 가출해 비행에 빠지는 아이들이 가정에 적응할 수 있도록 부모와 자녀가 서로 발을 씻어주면서 친밀함을 회복하는 ‘세족식’을 포함한 청소년감동캠프를 두 달에 한번씩 마련했다. 또 지난 6월26일 세계 마약퇴치의 날에는 시민들을 한자리에 모아 본드흡입 문제를 알리고 대책을 마련하는 ‘드림포럼’을 열었다. 인천지역 관계기관(인천지방검찰청, 인천보호관찰소, 인천지방경찰청, 인천광역시청)과 지역구 국회의원(신학용, 홍일표), 경인방송, 기술표준원, 서울소년원, 대전소년원 등에서 참여해 심각성과 대처방안을 함께 고민했다. 신학용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장은 8월 말 국회에서 간담회 개최를 약속했다.

MG밴드의 첫 공연 ‘Reborn’ 홍보포스터 <사진=김병철>

유혹과의 단절…진심은 통한다

‘세품아’ 공동체는 드림포럼에서 본드로 고통 받았던 아이들의 아픔을 전해주었다. 행사 마지막에 아이들이 본드 대신 몰입할 곳을 찾아주기 위해 결성된 ‘MG(Miracle Generation)밴드’의 공연이 있었는데, ‘다시 한번’이라는 제목의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의 모습은 본드로 인해 육체적, 정신적으로 겪은 고통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기회를 갖고 싶다는 외침으로 장내를 울렸다.

중독은 말 그대로 ‘벗어나기 어려운 묶임’이다. 더욱이 미성숙한 청소년이 이미 심각해진 중독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스스로의 의지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아이들이 중독돼 있는 것은 본드만이 아니다. 인터넷, 게임, 도박, 음란물, 음주 등에도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지난 6개월 간 재판을 하면서 1000명 정도의 보호소년들을 만나 다양한 가족력들을 읽고 들었다. 특히 엄마를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은 그 박탈감만으로 어떤 유혹에든 넘어가기 쉽다는 것을 이해했다. 아이들은 그 빈자리를 채울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 오히려 이렇게라도 살아서 사고라도 치고 다니는 것이 대견하다고 생각되는 아이도 있다. 어쩌면 사고뭉치 같은 이 아이들이야말로 험한 이 세상을 진심으로 대하고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른들의 진심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더 잘 알기에 상처받고, 주변을 맴돌고, 자기들끼리 뭉쳐 어울리는지 모른다.

하지만 소년원에 보낼 수 있는 막강한(?) 권한 때문에 아이들이 제일 무서워한다는 소년 단독판사로부터 본드흡입을 막으려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세품아’ 아이 중 하나는 판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니 진심은 통하는 걸까. 곧 성년을 앞둔 한 아이는 본드는 끊었지만 여전히 제 앞가림도 못하면서 청소년에게 본드를 팔지 못하도록 뭐든 돕겠단다.

‘Reborn’ 공연에서 MG밴드가 열창하고 있다. <사진=김병철>

올 여름 휴가는 ‘세품아’에서 생활하는 위기청소년 13명과 함께 몽골의 초원에 가기로 했다. 명성진 목사는 해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일상과 단절된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문명과 떨어져 유혹이 없는 상태의 자신을 경험하게 된다. 어떤 아이들은 가기 싫다고 난동을 피우고, 현지일정도 불확실하고, 비용도 부족하지만, 아이들의 인생에 아직 가능성이 있다고 확신하며 일단 떠난다. 직접 몸과 마음을 맞대어 아이들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은 아이들을 위한 고민의 시간일 뿐 아니라 내 자신에게도 휴식의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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