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의 나라 일본’ 이미지는 우연의 산물

‘일본’ 들어간 식물명 유난히 많아…네덜란드 의사 시볼트의 집념

식물 가운데 ‘일본’이 들어간 이름이 유난히 많다. ?일본단풍, 일본주목, 일본느티 등이 일본을 넣어 명칭을 지은 식물들이다. 랜덤하우스 간행 <보태니카 포켓 목본식물 도감(Botanica’s Pocket Trees & Shrubs)>에 수록된 식물 중 명칭에 ‘일본’이 붙은 것은 모두 44종이다. 이에 비해 ‘중국’은 25종, ‘인도’는 8종, ‘영국’은 7종 그리고 ‘한국’은 3종(한국전나무 등)이다.

식물 이름에는 일반명칭과 학명이 있다. 지금 인용된 수치는 영어 일반명칭 기준이다. 하지만 라틴어로 표기되는 학명에도 일본을 지칭하는 ‘japonica’, ‘japonicum’ 등을 포함하는 수종이 다른 지명에 비해 유독 많다. 일본은 국토 면적이 중국의 26분의 1이니 자생식물의 종류도 중국보다 훨씬 적을 텐데, 식물이름 수는 거꾸로다. 일본이 식물학 분야의 독보적 선진국이거나 식물 애호가가 유난히 많은 나라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런데도 이 같은 불균형이 생긴 이면에는 역사의 우연이 숨어 있다.

1996년 독일 우편 당국이 발행한 우표에 실린 시볼트의 초상

일본의 빗장 연 네덜란드 상인들

도쿠가와(德川) 막부 시대 말까지 일본은 쇄국정책을 펴 서양인들이 자국 땅에 발을 못 붙이게 했다. 그러던 중 동남아와 중국 각지를 배로 오가며 장사하던 포르투갈 상인들이 1543년 태풍에 떠밀려 일본 땅에 닿았다. 서양인과 일본인 사이 첫 직접 접촉이 일어난 사건이다. 이를 계기로 유럽인들은 일본과 교류하려 시도했으나 일본은 나라 문을 닫았다. 막부 입장에서 은·구리 등 일본산품과 유럽의 진기한 공산품을 맞바꾸는 거래 자체는 싫지 않았지만, 유럽인들이 교역 이외에 기독교 전파까지 시도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서양나라 중 막부가 인정한 유일한 예외가 네덜란드였다. 17~18세기 네덜란드는 다른 유럽 나라들과 달리 정치이념이나 종교 갈등이 없는 리버럴한 분위기의 나라였고 그 상인들은 교역 대상지에서 선교를 시도하지 않았다. 이런 네덜란드 상인들을 위해 막부는 1641년 나가사키 앞바다 작은 섬 데지마(出島)를 조차하도록 허가했다. 네덜란드 선박은 이 섬에만 접안하고, 거류민도 이 섬에만 거주한다는 원칙이었지만 허락을 받아 거류민이 섬 밖 육지로 나갈 수도 있었다.

다른 유럽 나라가 모두 배제됨으로써 네덜란드 상인에게 일본은 200년 이상 독점시장이자 블루 오션이었다. 당초 네덜란드인의 아시아 교역은 식민지 인도네시아에 근거를 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전담했지만 이 회사가 1795년 도산하자 네덜란드 정부가 그 자산과 부채를 떠안음으로써 기업인들이 아시아 비즈니스를 계속할 수 있었다.

데지마에는 동인도회사, 뒷날에는 네덜란드 정부가 파견한 의사가 한 명씩 상주했다. 이 의사는 섬의 몇 안 되는 거류민을 진료하는 역할 말고도 과학자 겸 지식인으로서 일본 문물을 탐구하는, 더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 역대 여러 명의 의사가 데지마에 주재했지만 그 중 필립 프란츠 폰 시볼트(Philipp Franz von Siebold)가 특별한 발자취를 남겼다.

네덜란드 레이든 시에 있는 시볼트후이스

첩자 혐의로 추방되며 식물표본 가져가

시볼트는 1796년 지금의 독일 뷔르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의과대학에 다닐 때부터 해외문물에 관한 책에 빠졌던 그는 의사 자격을 얻은 뒤 네덜란드로 가 군의관으로 지원했다. 인도네시아 주둔 네덜란드군으로 파견될 것을 기대한 결정이었다. 뜻이 이뤄져 1823년 시볼트가 총독부가 있는 자카르타(당시 명칭 Batavia)에 도착했을 때 총독이 그에게 뜻밖의 보직인 데지마 근무를 명함으로써 7년 가까운 그의 일본 생활이 시작됐다.

데지마에 머문 지 얼마 안 돼 시볼트는 한 영향력 있는 지방관리의 병을 고쳐준 것을 계기로 ‘용한 양의사’란 평을 받았다. 이후 그는 섬 밖에서의 지방민 진료를 허락 받았다. 게다가 일본인 50명을 학생으로 받아 의료학교까지 개설했다. 학생들은 모두 막부로부터 입학허가를 받았다. 그 무렵 이미 나가사키 일대에는 네덜란드어가 꽤 많이 통용되고 있었다.

시볼트의 주된 관심사였던 일본문물 연구에 의료학교 학생들이 큰 도움이 됐다. 학생들 역시 시볼트로부터 의술뿐 아니라 서양에 관한 전반적 지식을 전수 받았다. 그 시절 일본에서 서양 문물에 관한 공부를 ‘란가쿠(蘭學)’라 불렀다. ‘화란(和蘭, 네덜란드)’에 관한 학문이란 뜻이다. 의료학교 학생들은 동시에 란가쿠 학회원이기도 했다.

시볼트의 진료를 받은 일본인 환자들은 답례로 작은 공예품, 생활도구, 목각그림 등을 선물했는데 이 역시 일본연구의 금쪽같은 자료들이었다. 그러나 일본문물 중 시볼트가 특히 몰두한 분야는 식물이었다. 그는 데지마의 자기 집 뜰에 온실까지 갖춘 작은 식물원을 조성해 미친 듯이 표본들을 수집했다.

일본 체류 5년 여 되던 때 시볼트에게 언짢은 일이 닥쳤다. 일본인이 제작한 동아시아 일대 지도를 그가 입수한 사실이 막부에 알려진 것이다. 막부는 시볼트를 당시 일본과 영토분쟁 중이던 러시아의 첩자라고 의심해 데지마 밖으로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금족령의 제약 속에서도 그는 연구를 계속했으나1829년 막부가 아예 추방령을 내렸다.

시볼트를 태우고 데지마를 떠나는 배에는 그의 분신과도 같은 수집품들이 모두 실렸다. 추방령 전에도 그는 데지마의 자택에 소장공간이 모자라 여러 차례 수집품들을 유럽으로 실어냈었다. 이 중 식물만 1000종이 넘었다. 중국이나 한국에도 자생했겠지만 일본 땅에서 반입된 이들 식물에 유럽인들은 ‘일본’ 표기를 붙여 불렀다. 시볼트의 이름이 학명의 일부가 된 경우도 많았다.

지금 세계적 명소가 된 네덜란드 레이든(Leiden) 시 소재 국립식물원과 국립 민족지(民族誌) 박물관은 시볼트의 수집품을 바탕으로 세워졌다. 별도로 그의 사저를 개조해 만든 박물관 시볼트후이스(SieboldHuis, 시볼트 집)도 같은 도시에 있다.

데지마의 시볼트 일가를 담은 당시 일본 화가의 그림. 망원경으로 입항하는 배를 관찰하는 사람이 시볼트이고, 오른쪽에 아기(이네)를 안은 여인이 동거녀 쿠수모토 타키다.

딸은 일본 최초 여성 양의사

시볼트는 데지마에 있는 동안 한 일본여성과 살면서 딸 하나를 두었다. 어머니 성을 따 ‘쿠수모토 이네’라 불린 이 딸은 아버지와 이별할 때 두돌박이였다. 그는 자라면서 아버지의 후임 의사들로부터 서양의학 공부를 해 나가사키에 산부인과 의원을 차렸다. 네덜란드에 정착한 시볼트도 딸이 의학 공부를 하는 동안 약품 등을 우송해 주며 격려했다. 일본 역사는 이네를 자국 최초의 여성 양의사로 공인하고 있다.

시볼트가 떠나고 24년 뒤 일본 막부는 미국인 페리 제독이 이끌고 온 함대의 위세에 눌려 나라 문호를 열었다. 페리는 일본행 함대를 인솔하기 전 시볼트로부터 일본에 관한 사전 지식을 얻고 조언도 받았었다. 당시 시볼트는 일본에 관한 여러 책을 쓰고 있었다.

개항과 함께 데지마의 존재가 무의미해지고, 일본이 시볼트를 경계할 이유도 없어지자 막부는 추방한 지 30년 만에 그를 사면했다. 그 직후 시볼트는 다시 일본 땅을 밟았고, 딸도 만났다. 그의 나이 예순 셋, 딸은 서른 세 살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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