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이 운명 바꾼다” 싱가포르 리콴유 스쿨

리콴유 스쿨 리카싱관. 리카싱의 어록 “knowledge reshapes destiny (지식이 운명을 바꾼다)”가 새겨져 있다. <사진=오룡>

“아시아 상생번영, 우리가 책임진다”
글로벌 인재의 산실 ‘리콴유 스쿨’

“knowledge reshapes destiny (지식이 운명을 바꾼다)” 싱가포르 리콴유 스쿨 건물에 새겨진 한마디다. 어록의 주인공은 ‘Dr. Li Ka Shing(리카싱 박사)’이다. 리카싱이 누구인가. 아시아인으로 유일하게 세계 10대 부호 명단에 들어 있는 홍콩 최대재벌이다. 이 건물은 그의 후원금으로 지어진 리카싱관이다.

리카싱의 부가 상징하듯 이 학교는 최상급 인재들이 모인 곳이다. 공식 명칭은 싱가포르국립대(NSU) 리콴유공공정책대학원(LKYSPP). NSU 본교와 별도로 도심 북서쪽 부킷 티마 캠퍼스에 법학대학원과 함께 자리잡고 있다. 학교이름에 붙은 리콴유(李光耀)는 물론 31년간 총리를 지낸 싱가포르의 사실상 국부(國父)다. 널리 알려진 싱가포르의 엘리트 양성 정책도 리콴유의 통치철학에서 비롯됐다.

리콴유는 “가장 우수한 인재가 국가를 이끌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 아래 소수의 엘리트 교육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 논리적 근거로 흔히 사자 무리의 예를 든다. 우수한 숫사자가 치열한 경쟁을 거쳐 다수의 암사자로 구성된 무리를 이끄는 것은 결코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수한 종족보전과 무리의 풍요로운 생존을 위해서다. 사람도 이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리콴유 스쿨에선 거의 매일 세계 석학, 전문가들이 다양한 형태의 강연을 한다. 로드릭 맥파쿠어 하버드대 정치학 교수 초청 강연 모습. <사진=오룡>

리콴유 스쿨은 싱가포르를 일으켜 세운 ‘엘리트의 힘’을 아시아로, 글로벌 무대로 확장시킨 인재의 산실이다. 56개 국적의 학생 400여명이 빈곤과 무질서에서 선진국가를 건설한 싱가포르식 리더십을 배우고 있다. 재학생들은 정부관리, 변호사·의사 등 전문직, 언론인, NGO 활동가 등의 실무경험을 쌓은 사람들이다. 공공정책, 행정학, 경영학 석·박사과정 모두 최소 5~8년의 공공분야 경력이 지원자격이다. 현재 재학생 중 싱가포르 출신은 20% 이하고 80% 이상이 외국인이다.

40여명의 전임, 30여명의 방문·겸임 교수진도 다국적 두뇌집단이다. 전공분야는 국제법, 보건, 통화정책, 도시계획, 물관리, 세계화, 국제기구, 갈등조정, 부패방지, 경쟁력, 규제개혁, 불평등, 생산성 등 현장중심적이다. 이들 분야가 곧 워크숍 프로그램이자 학위과정이 된다. 현재 1000명을 넘어선 졸업생들은 외교관, 국제기구 스탭, 사회적 기업인, 저술가, 개발협력 활동가 등으로 다양한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다.

리콴유 스쿨은 NSU가 하버드대 케네디 스쿨과 공동운영해온 지도자 양성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2004년 8월 문을 열었다. 개교 이후 케네디 스쿨 외 콜럼비아대학, 런던 정경대학, 파리정치대학 등 명문대학들과 공동학위과정을 개설했다. 초일류 아니면 상대하지 않는 싱가포르의 성향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렇게 최고 리더십을 지향하지만 학생들의 시선은 항상 낮은 곳을 향하도록 이끈다.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경쟁이 아니라 상생과 공존, 공익을 앞세우는 지성을 늘 강조한다.

강연장마다 예외 없이 참석자들의 열띤 토론이 벌어진다. <사진=LKYSPP>

공공행정 석사과정에 다니는 탄라이용(Tan Lai Yong)은 싱가포르 의사다. 그는 1996년 중국 위난성 쿤밍으로 가 그곳에 살면서 오지마을 나병환자들을 돌보고 조산과 자가치료법을 가르치는 등 15년간 의료봉사를 했다. 마오쩌둥 시절의 ‘맨발의 의사(barefoot doctors)’ 활동을 홀로 실천에 옮긴 것이다. 주민들에 대한 그의 헌신이 알려지면서 중국총리 표창 등 상도 받았다. 그는 “공공정책 이슈에 관한 이해를 통해 더 많은 공동체에 치유와 행복을 안겨주는 방안을 찾기 위해 리콴유 스쿨의 문을 두드렸다”고 했다.

리콴유 스쿨은 연중 300명 이상의 세계적 석학, 지성인, 사상가, 정책결정자, 활동가 등을 초청해 강연을 연다. 정규수업 외에 거의 매일 다양한 형식의 토론이 열리는 셈이다. 초청연사 가운데는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 아마르티아 센 노벨상 수상 경제학자?? 등 큰 인물들이 즐비하다.

공공정책 석사과정의 타지키스탄 출신 시토라 쇼카몰로바는 “이곳 프로그램이 나를 상자 속 사고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정책과제의 새로운 해결책을 찾아나가면서 창의성과 혁신의 힘을 실천적으로 깨달았다. 그것은 나에게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다”고 말했다.

리콴유 스쿨은 아시아적 가치를 글로벌 무대에서 실현하는, 아시아의 운명을 바꾸는 ‘실천적 지식의 허브’로 뻗어나가고 있다.


‘아시아의 시대’ 주창자 마부바니 리콴유 스쿨 원장

2004년 개교 이래 리콴유 스쿨을 이끌고 있는 키쇼어 마부바니(Kishore Mahbubani·65) 대학원장은 ‘아시아의 시대’ 주창자로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지난 200년간 세계사의 들러리로 머물던 아시아가 그 이전 1800년 동안 차지했던 중심축 역할을 되찾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리콴유 스쿨은 바로 아시아의 시대를 견인할 차세대 지도자 양성의 터전인 셈이다.

마부바니 원장은 싱가포르 외교부 차관과 주유엔대사를 지낸 외교관 출신이다. 인도계 힌두 가계 출신인 그는 외교전문지 <포린 폴러시>가 선정한 이 시대의 지성 100인 중 하나로 선정된 바 있다. 한글 등 12개 언어로 번역 출간된 <헬로 아시아(The New Asian Hemisphere: The Irresistible Shift of Global Power to the East)> 등 4권의 저서가 있다.

왜 ‘아시아의 시대’인가?

“서구가 정치·경제·과학·사상 등 전 분야에서 약진하던 지난 2세기 동안 아시아는 무력했다. 그 시대는 이제 끝났다. 21세기의 아시아의 세기다. 오늘날 아시아는 자유시장경제, 혁신적 과학기술, 법치주의까지 많은 영역에서 서구의 장점들을 이해하고 수용했다. 이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방식으로 혁신을 이뤄내고 있다. 아시아인의 약진은 역사의 대세다. 2050년쯤이면 세계경제의 중심은 중국·인도·일본·한국이 이끄는 아시아가 될 것이다.”

그런 지론을 기회 있을 때마다 서구인들에게 강조하는 이유는?

“나는 일생 지식 유목민(nomadic intellectual)으로 살아왔다. 그동안 지식의 센터를 섭렵하며 정말 우수한 서구의 지성에 압도 당했다. 그리고 그들의 사고와 영감, 에너지를 흡수했다. 그런데 그 위대한 서구 지성인들이 새롭게 떠오르는 현실에 무감각한 것을 보고 개인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우쭐한 자기만족 속에 안주하고 있었다. 나는 강연과 글을 통해 세상이 ‘단일문명’에서 ‘복합문명’으로 바뀌고 있음을 강조했으나, 서구인들을 충분히 설득시키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은 대안적 세계관(weltanschauung)이 필요한 시기다. 그 새로운 세계관으로 서구의 지적 안일을 일깨우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렇지 않고 서구가 아시아의 도약에 저항한다면 세계는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아시아의 시대에 리콴유 스쿨이 할 역할은?

“싱가포르는 세계 최적의 공공정책 실험실임을 국제사회가 인정하고 있다. 리콴유 스쿨은 양질의 교육과 연구를 통해 아시아의 공공정책 현장에 통찰력을 제공한다. 우리는 금융과 정치권력, 국제관계와 리더십, 경영과 행정을 융합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런 훈련을 통해 학생들이 각 나라 사회구조와 함께 에너지, 안보, 금융 같은 글로벌 이슈에 대해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리콴유 스쿨은 차세대 아시아 정책결정자들의 네트워크이기도 하다.”

변혁을 대중이 아닌 엘리트 지도자가 이끌어가는 것이 바람직한가?

“2007~2009년 사이 겪은 국제 금융위기는 우리에게 소중한 교훈을 안겨주었다. 자유시장에는 ‘보이지 않는 손’과 함께 좋은 지배체제(good governance)라는 ‘보이는 손’가 필요하다는 각성이다. 요즘 공공정책의 중요성이 새삼 강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공공정책의 가능성을 탐구한 젊은 지도자들이 개혁에 앞장설 필요가 있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