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굿바이! 영원한 ‘젊은’ 감독 오시마 나기사
*대한민국 대표 영화광인 한상훈 씨가 지난 15일 별세한 일본의 영화감독 ‘오시마 나기사’를 추모하며 아시아엔(The AsiaN)에 글을 보내왔습니다. 1990년대 대표적인 시네마키드인 한상훈(36)씨는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화이론을 공부했습니다. 영화계에서 그의 존재를 모르면 간첩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영화와 함께?살고 있는 청년입니다.
영화의 마력에 빠지게 만들었던 ‘오시마 나기사’
세계영화사에 남는 거장인 오시마 나기사가 별세했다. 슬픔을 느끼며 내가 좋아했던 오시마 나기사 영화에 얽힌?개인적인 추억들을 떠올려 본다.
오시마 나기사는 음악을 통해 먼저 알게 됐다. 즐겨듣던 라디오 영화음악 프로그램에서 자주 나오던 곡이 오시마의 영화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의 주제곡인 ‘Merry Christmas Mr.Lawrence’였다. <마지막 황제>의 음악을 좋아했던 나는 그 영화 음악의 작곡가인 류이치 사카모토가 ‘Merry···’도 작곡했다는 사실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음악을 참 좋아했다.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를 보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오시마 영화와의 첫 만남은 1997년에 이뤄졌다. 나에게 영화가 ‘운명’이었는지 ‘저주’였는지에 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현재를 살고 있지만 아무튼 1997년은 내가 본격적으로 영화에 미치게 된 해였다.
그 중심에 철학과 주최로 열렸던 ‘성과 파시즘’ 영화제가 있었다. 평소의 나 같았으면 결코 이 영화제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어머니로부터 뭘 할 거면 제대로 하라는 핀잔을 들었던 것이 내가 그 영화제에 가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영화에 관심이 있다면 가리지 말고 모든 영화를 다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성과 파시즘’ 영화제의 상영작들 중에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이 있었다. 그 영화제에서 내가 영화라는 매체를 다시 보게 만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작품은 <시계태엽장치 오렌지>였지만 그 영화제 자체가 이후로 나에게 끼친 영향을 생각한다면 <감각의 제국>도 분명히 나를 영화에 본격적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던 영화들 중 한 편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감각의 제국>을 보면서 정말 지독하다는 생각을 했고 마지막 장면에서 왠지 슬펐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오시마의 영화를 처음 접한 후?2003년 1월 ‘오시마 나기사 회고전’이 국내에서 최초로 개최되었을 때 상영작들을 모두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아마 회고전 첫 날이었던 것 같은데 그날 나는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를 보러온 엄청난 인파 속에 있었다.
그날의 풍경을 비디오 카메라로 담았다. 줄을 서서 기다리던 나는 결국 <청춘 잔혹 이야기>가 매진이 되는 바람에 그날 보지 못했다. 회고전 기간 내내 매진이 끝없이 이어지며 수 천명의 관객들이 오시마의 영화들을 열렬한 반응 속에 봤던 것으로 기억한다.
늘 새로움 추구하며 에너지 넘치는 전위적인 작품 만들어
‘오시마 나기사 회고전’의 상영작들 중에는 걸작들이 많았는데 그 중 나를 가장 사로잡았던 영화는 바로 1960년작인 <일본의 밤과 안개>였다. 이 작품은 당시 영화계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던 프랑스 누벨바그와 호흡을 같이 한 새로운 영화였다. 사실 내가 정치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라서 일본의 정치적 현실을 비판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이 영화의 내용을 그 당시 잘 이해했다고 볼 수는 없다.
나는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형식에 완전히 압도되었다. 암울한 정조를 띤 불협화음의 음악을 배경으로 연극적인 세트 속에서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끊임없이 정치적 토론이 이루어지는 이 영화는 쉴 새 없이 움직이면서 인물들에게 과감히 돌진하기도 하는 카메라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어쩌면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카메라 그 자체였다. 카메라가 격렬하게 움직이면서 뿜어내는 에너지는 실로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연극적인 조명을 사용해서 장면전환을 하고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방식도 신선했다. 이 영화는 보는 관객들에게 전달될 수 있을 정도의 격렬한 에너지로 넘쳐났다. 오시마는 이 영화에서 당시의 일본사회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다.?이 영화를 보고 혁신가로서의 오시마의 면모에 완전히 반해버렸다.
회고전 이후로 오시마의 영화가 상영될 때마다 거의 빠짐없이 챙겨보았고, 영화 속 정치적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었으나 그의 급진적이고 창의적인 형식 실험에는 늘 열광하곤 했다. 그의 영화들 중 거의 유일하게 실망했던 작품은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1978년작 <열정의 제국>이었다. 이 영화는 처음 보았을 때 별다른 감흥이 없어서 영화를 잘못 보았나 하는 생각으로 다시 보았지만 두 번째 관람 때도 몇몇 이미지가 인상적이었을 뿐 역시 큰 감흥을 얻지 못했다. 오시마다운 강렬한 에너지가 이 영화에는 없었다. 아쉽게도 후기로 갈수록 오시마의 영화는 점차 예전의 활력을 잃어갔다.
사실 내가 이해하기에는 결코 쉽지 않았던 오시마의 영화에 내가 그토록 열광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의 영화가 지니고 있는 형식적 급진성 때문이었던 것 같다.
고다르를 좋아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오시마는 ‘일본의 고다르’라고 불렸다. 오시마의 영화는 뭔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내게 대리만족을 시켜줬던 것 같다. 오시마 나기사는 지금까지? 보았던 수많은 영화들 중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정도의 전위적인 영화들을 만들었던 위대한 영화 작가였다.
거대한 시네마스코프 화면 속에서 국가와 사회 그리고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에 대항하여 터져나오던 분노가 나를 완전히 압도하던 순간들을 잊을 수 없다. <사랑과 희망의 거리>, <청춘 잔혹 이야기>, <태양의 묘지>, <일본의 밤과 안개>, <열락>, <백주의 살인마>, <일본춘가고>, <교사형>, <소년>, <도쿄전쟁전후비화>, <의식> 등….
앞으로도 삶이나 영화가 진부하게 느껴질 때면 오시마의 영화를 보면서 그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끓어오르는 에너지로 충만해지고 싶다. 더 이상 그의 신작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슬프다. 나에게 오시마 나기사는 영원히 ‘젊은’ 영화감독으로 기억되리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글=한상훈/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영화이론 석사과정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