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스페셜올림픽에 보내온 하늘나라 편지

1998년 왕년의 은막스타와 빙상대표선수로서 명성을 얻었던 하상남(71, 예명 하연남, 왼쪽)·이효창(76, 오른쪽) 부부.

사랑하는 하상남 당신!

1944년 현해탄을 건너 일본 빙상계에 진출, 일본 황실이 주관하는?일본 빙상 선수권배를 획득하고 개선한 이효창 선수가 유서 깊은 한강에 우뚝 서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

얼마 만에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지 모르겠소. 요즘 서울은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며 무척 춥다고 들었소. 내가 이곳에 온 지도 6년 반이 지났구려. 지난해 한국이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을 유치했을 때 KBS에서 ‘한국의 유산’ 프로그램을 통해 나 ‘이효창 편’을 보도했다지요. 거기서 나를 대한민국 빙상계에서 쾌속 질주를 일궈낸 인물로 치켜세웠다고 들었소. 그러고 보니 72년 전, 그러니까 1941년 일본 메이지신궁빙상대회에서 내가 남자 500m와 3000m에서 우승하던 기억이 생생하오. 당시 나는 조선의 스케이터로서 일본 관중들 앞에서 식민지 설움을 잠시나마 잊고 조국에 자부심을 선사한 뿌듯함을 만끽했다오.

1941년 전일본종합대회 우승과 이듬해 전일본선수권대회 우승 그리고 1943년 동아시아 빙상대회 중장거리 전 종목을 휩쓸어 당시 일본인들은 우리를 부러워하면서도 질시하기도 했었지요. 마침내 1948년 스위스 생모리츠에서 열린 동계올림픽 무대에 해방 후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했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꿈만 같습니다. 불행히도 배탈이 나 부진한 성적을 내어 얼마나 허탈했는지, 또?국민들께 죄송했던지…. 그래도 귀국하는 길에 노르웨이 빙상선수권대회에 출전해 1500m에서 준우승을 해 노르웨이 황태자로부터 메달을 받던 기억이 새롭구려.

하상남 발명가.

사랑하는 하상남 여보!

당신이 올해 벌써 여든일곱이구려. 나보다 다섯 살 아랫니까, 그렇지요? 당신이 나와 함께 1992년 10월 독일 뒤른베르크에서 열린 국제아이디어발명 신제품전시회에서 대상을 받아 매스컴이 온통 주요기사로 다뤘던 기억 당신도 나지요? 당신은 1950년대 허장강, 김진규 등 당시 내로라 하는 배우들과 콤비를 이뤄 <처녀별> <노들강변> 등에 출연해 이름을 날렸지요. 그때 당신이 나를 얼마나 설레게 만들었는지 아마 상상도 못할 거외다.

우리가 1984년 여러 광물질이 혼합된 ‘세리온’이라는 물질을 개발해 비누도 만들고 화장품도 제조했지 않았소? 나는 서울 용산의 부잣집에서 태어나 국가대표 스케이트선수를 지내고 고려대학 졸업 후엔 사업가로도 이름을 떨치고 돈도 모았지요. 당신은 충북 청원의 양반집 외동딸로 태어나 경성여의전을 다니던 17살 꽃다운 나이에 화타가 저술한 광물질편에 심취해 지금껏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의약품 개발에 60년 이상 혼신의 힘을 쏟은 것도 다 하늘이 정하신 인연이 아닌가 합니다. 나와 세리온도 개발하고 말이오. 당신은 불행히도 한국전쟁 무렵 폭발물 사고로 오른손가락을 다쳐 자살까지 생각할 만큼 끔찍한 상황이었지만 마침내 일어나 나를 만나게 된 것도 또한 하늘이 우리에게 내린 인연 아니겠소? 우리가 함께 효창세리온을 설립한 게 1972년이니 40년 세월이 더 지났구려. 돈도, 명예도 얻었지만 여기 와보니 다 부질없는 일입디다.

내 사랑하는 하상남 여사.

이제 이달 말이면 평창에서 2018년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평창스페셜올림픽이 열린다고 들었소. 당신도 그곳에 가는지요? 내가 선수생활 할 때는 물론이지만, 내가 이곳으로 온 2006년만 해도 전혀 상상도 못할 일이 평창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소. 20년 이상 감금생활을 하며 미얀마 민주화에 평생을 바친 아웅산 수치 여사도 참석한다고 들었어요. 딸이 장애를 안고 있는 나경원 전 의원이 조직위원장이라지요? 자기 동네에 장애인학교 들어선다고 플래카드 내걸며 반대하고, 장애인 자식 부끄럽다고 외출도 못하게 하던 고관대작들도 한둘이 아니던 시절과 비교하니 대한민국이 참 많이 변했단 생각이 듭니다.

1947년 대한민국 건국 이래 처음 출전하게 될 제5회 동계 올림픽 대회를 앞두고 애석하게 숨진 전경무 선생 유가족 위문 겸 미국에 주재하고 있던 월터 정 총무와 합류하기 위해 미국으로 출발하기 전 노스웨스트 항공기 앞에서의 우리 선수단 일행. 왼쪽으로부터 최용진 감독, 이종국, 이효창, 문동성 선수.

사랑하는 하상남 당신.

우리가 발명한 세리온 광물질이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치료와 치유, 그리고 위로의 빛을 주었으면 정말 좋겠어요. 내가 미처 못다한 일, 당신이 꼭 마무리 해주기 바랍니다. 나도 여기서 외로울 땐 당신이 어서 내 곁에 왔으면 하고 생각한 적도 솔직히 여러 번 있었어요.

그런데, 그런데 말이오. 내 사랑하는 하상남 여보. 그게 아니더이다. 당신과 내가 함께 못 마친 그 일, 장애와 불치병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희망을 줄 ‘세리온 치료제’를 완성할 때까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내 몫까지 해주길 바라오. 아 참, 한국에는 새로 뽑힌 박근혜 당선인이 다음달 25일 취임한다고 들었소.

내가 대한민국에 아직 정부가 들어서기 전 1947년 이승만 박사의 밀명을 받고 유엔에 파견돼 그의 친서를 전하던 일이 생각나는구려. 그때나 지금이나 나라사랑, 겨레사랑은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지녀야 할 덕목이 아닌가 하오.

사랑하는 나의 아내 하상남 여사. 다시 바라건대 내가 못 다한 일, 당신이 마무리하고 천천히 오길 바라오. 나도 이곳에서 평창스페셜올림픽을 내려다보며 장애를 딛고 최선을 다할 후배 스케이터들에게 오랜만에 목이 터져라 응원할 테니까요.

2013년 1월10일 하늘에서 사랑하는 아내 하상남에게 이효창이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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