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7일] 이스라엘-레바논, 팔 난민 학살 공조

2011년 월가를 처음 점령한 날

2011년 9월17일 수백 명이 미국 뉴욕의 월스트리트로 쏟아져 나왔다. 이들의 목적은 금융가의 탐욕과 부패, 가진 자들에게 유리한 금융시스템 등에 항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이 든 펼침막에는 ‘부패는 이제 그만’ ‘특권층을 끝장내자’ 등의 구호가 적혀 있었다. 월스트리트 한복판에서 수백명이 시위를 벌인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분노의 날’로 명명된 이날 시위는 온라인잡지 애드버스트가 주축이 돼 수개월 전부터 트위터를 비롯한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기획됐다. 뉴욕타임스는 주최 측의 말을 인용해 “1969년 시카고에서 열린 베트남전 반전 시위를 참고했다”면서 “올해 초 이집트, 스페인, 이스라엘 등지에서 일어난 시위를 본땄다”고 전했다.

주최 측은 2만여명의 시위자를 모아 월가 일대를 미국판 ‘타흐리르 광장(이집트 민주화 시위 중심지)’으로 만들 계획이었다. 그러나 경찰이 증권거래소와 페더럴홀 인근 거리를 모두 봉쇄한 데다 예상보다 적은 인원이 참가하면서 실패했다. 시위대는 “이 나라에는 수백만명의 실업자가 있다”며 “1%가 99%의 부를 독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날 시위에는 진보·보수를 망라한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했다. 극우주의자인 린든 라로슈의 추종자들이 합창단을 결성해 거리의 한쪽에서 미국 국가를 불렀다. 다른 한쪽에서는 침낭과 텐트를 들고 나온 무정부주의자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2002년 고이즈미 총리.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정상회담

2002년 9월17일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북한을 방문,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평양 백화원초대소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국교정상화 문제를 비롯한 현안들을 논의했다.

김위원장은 당시 “핵과 관련해 제반 국제협약을 모두 준수하고 미사일은 기간 제한 없이 발사를 동결하겠다”고 약속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양국 정상회담 성사로 북한은 양국간 수교때 일본에 대해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과 전후(戰後) 적대행위에 대한 배상금 등을 요구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고, 일본은 자국이 동북아 문제의 주역임을 세계에 알리게 됐다고 자평했다.

김위원장은 정상회담을 통해 북한의 일본인 납치와 괴선박 공작에 대해 전면 인정하고 사과, 자신의 대일관계 회복 의지를 보여주려 했다. 그런데 피랍된 14명의 일본인 중 8명이 사망했다는 사실이 일본 열도에 전해지면서 일본 내 분위기가 분노로 돌변, 북일관계 전망도 급격히 악화됐다. 사망한 8명의 일본인들에 대한 타살 의혹이 확산되면서 ‘사망자 진상규명’이 북-일간 또 다른 쟁점으로 떠올랐다.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1991년 대한민국이 국제연합(UN)에 가입했다. 그것도 북한과 동시에. 1991년 9월17일 오후 3시30분(한국시간 18일 오후 4시30분)에 열린 제46차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유엔가입안이 159개 전 회원국의 만장일치로 승인됐다.

남한은 1948년 제3차 유엔총회에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된 뒤 1949년 1월부터 여러 차례 유엔 가입을 신청했지만 상임이사국인 소련의 거부로 번번이 부결되곤 했다. 북한 역시 1949년 2월 가입을 신청했지만 소련 이외엔 협조해주는 나라가 별로 없어 심사조차 받지 못했다. 결국 1991년에야 남북한의 동시 유엔가입이 이루어진다. 미국 뉴욕 이스트강변에 위치한 유엔본부 앞 광장에 태극기와 인공기가 나란히 게양됐다.

이로써 1948년 유엔의 감독 아래 서울과 평양에서 각각의 단독정부가 수립된 지 43년 만에 남과 북은 국제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공식 인정을 받게 된다. 남북한 동시 유엔가입으로 어느 쪽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냐는 정통성 시비에 종지부를 찍는 계기가 됐다. 소모적 대결을 멈추고 평화정착을 위한 하나의 제도적 장치가 마련됐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2개의 국가로 인정된 이상 분단이라는 현실을 국제사회에 공식화한다는 부담도 적지 않았다.

한국전쟁 이후 줄곧 북한은 남북한 각각의 유엔가입을 반대해 왔다. 남북의 분단이 고착화된다는 이유였다. 이 때문에 당시 북한은 남북한 공동의 단일 의석으로 유엔에 가입하고 대표권을 교대로 갖자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남측은 남한 단독으로라도 가입을 추진했다.

남북한 유엔동시가입 계획을 ‘반민족적 범죄’ 행위로 비난하던 북한은 결국 남한의 단독가입을 견제하기 위해 1991년 5월 “남북한 단일의석 가입 입장을 철회한다”고 공식 발표한다. 뒤늦은 입장변화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남한보다 이른 7월에 유엔가입 신청을 냈고 한국은 9월 초 신청서를 제출한다. 가입신청 순서에 따라 북한은 160번째, 남한은 161번째 유엔 회원국이 됐다.

1982년 사브라ㆍ샤틸라 학살

1982년 9월16일 레바논의 파시스트 정당인 팔랑헤당 소속 기독교 민병대가 이스라엘군의 방조 속에 서(西)베이루트 사브라와 샤틸라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에 난입, 무차별 학살을 시작했다.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한 지 석 달 만에, 그리고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눈물 속에서 시리아로 근거지를 옮긴 지 불과 수주일 만에 일어난 이 학살 사건은 전 세계에 놀라움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이스라엘은 PLO가 시리아로 철수하는 조건으로 휴전이 이뤄지면 서베이루트로 진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미국 레이건 행정부에 한 바 있지만, 메나헴 베긴 총리와 아리엘 샤론 국방 장관은 이 협정을 무시하기로 결정했고, 9월15일 아침 이스라엘군이 서베이루트로 밀려들어와 이튿날에는 전 지역을 장악했다.

미국과 레바논 정부는 이스라엘에 항의했지만, 힘없는 레바논 정부만이 아니라 힘 있는 미국 정부도 말과 속셈이 달랐던 듯하다. 이스라엘군은 중무장 병사들과 탱크로 사브라와 샤틸라 난민촌을 포위한 뒤 레바논 극우파 민병대원들을 난민촌 안으로 들여보냈다.

9월16일 오후부터 18일 오전까지 만 이틀동안 벌어진 ‘살인 파티’의 희생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국제적십자사의 비교적 보수적인 집계에 따르더라도 피살자는 2750명에 이른다. 이 수치는 주로 현장에 널브러져 있던 시신들을 기초로 한 것이다.

이 시신들은 대부분 사지가 절단돼 있었다. 민병대원들은 학살의 무기로 기관총보다는 도끼나 대검을 더 선호한 것이다. 이 학살자들이 불도저를 동원해 판 구덩이에 묻은 시신들은 제대로 발굴되지 않았다. 거기다 피납ㆍ실종자들까지 계산하면 피해자 수는 훨씬 더 늘어날 것이다. 잔인하고 더러운 이 작전의 방조자 아리엘 샤론은 이스라엘 총리를 지내다가 2006년 뇌혈관 질환으로 혼수상태에 빠져 총리직에서 퇴임, 2012년 현재까지 식물인간 상태로 투병 중이다.

독일 주간지 <슈피겔>은 1983년 2월에 집단학살에 가담했던 한 민병대원을 인터뷰했다. 이 민병대원은 다음과 같이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우리의 장교들은 ‘너희들과 동행할 이스라엘 친구들이 임무수행을 도와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가능한 한 화기를 사용하지 말것을 지시했다. ‘모든 것이 조용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우리는 다른 동료들은 쳐다봤다. 그들은 총검과 칼로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계곡에는 피투성이 시체들이 즐비했다.……………우리는 시체들을 지나치며 걸었다. 시체들에 발이 걸려 넘어지기도 하면서 우리는 모든 목격자들을 사살하고 칼로 찔러 죽였다.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일단 몇 번 해보고 나면 쉬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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