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3일] 평양에 울려퍼진 남한 국민가수 조용필의 노래
2010년 필리핀 전직경찰 홍콩여행 8명 죽인 인질극
2010년 8월23일 필리핀 수도 마닐라 리잘공원 인근 마닐라 오션파크 바로 앞에서 홍콩 관광객들을 태운 관광버스에 탑승한 인질범이 10시간 가량 인질극을 벌인 끝에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 저녁 8시에 시작된 필리핀 경찰의 인질 진압 작전 과정에서 홍콩 관광객 8명이 숨지고 7명이 크게 다쳤으며, 인질범도 현장에서 숨졌다.
당초 이 버스에는 필리핀을 찾은 홍콩 관광객과 현지인 등 25명이 탑승해 있었으며, 앞서 어린이와 노약자 등 9명이 석방됐고 버스 기사가 탈출했다.
이 사건으로 홍콩은 물론 중국 관광객도 급감하면서 필리핀은 큰 타격을 입었다. 홍콩당국은 특히 “필리핀 당국의 어설픈 구조 작전이 인명피해를 키웠다”며 분노했다. 한 발 더 나아가 홍콩당국은 필리핀의 사건 대처능력이 ‘상당히 후진적’이라는 뉘앙스의 발언도 했고, 직접 필리핀 대통령에게 홍콩 수반인 도널드 창 행정장관이 전화로 항의까지 하려 했지만, 통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인질범은 롤란도 멘도사라는 전직 경찰. 부패 혐의로 경찰직에서 파면 당하자 M16 소총으로 무장한 채 자신의 복직 등을 요구하며 인질극을 벌이게 됐다. 인질범은 재직시 최우수 경찰관으로 선정될 정도로 모범적인 공직자였다. 지난 1986년 국제청년회의소(JCI)에 의해 전도가 유망한 최우수 경찰관 10명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된 인물이다.
비리에 연루돼 경찰에서 파면되기 직전인 올해 초까지 그는 17차례나 상을 받을 정도로 모범 경찰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공적은 지난 1986년 당시 페르디난도 마르코스 대통령의 비자금 해외 반출 시도를 좌절시킨 일. 독재와 부정부패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의 봉기로 권좌에서 축출된 마르코스는 해외 도피 과정에서 150만달러의 현찰과 고가품 등을 13개의 나무 상자에 담아 국외반출을 시도했다. 당시 마닐라경찰국 산하 특별수사대 팀장이던 멘도사는 이 첩보를 입수하자마자 전광석화같은 작전을 주도, 반출 시도를 좌절시켰다. 이로써 그는 전국민적 영웅이 됐다. 근면함과 강직함이 칭송받으면서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금품갈취 혐의였다. 화교가 운영하는 한 호텔의 주방장으로부터 2만페소(441달러)를 빼앗고, 돈 지급을 거부하는 주방장에게 마약을 강제로 먹게 한 것으로 확인됐다. 멘도사는 또 함께 파면된 부하 4명과 함께 피해자인 주방장에게 불법주차, 무면허운전 및 불법 마약 복용 등을 눈감아주는 대가로 돈을 갈취하려한 혐의도 받았다.
멘도사의 이런 일탈된 행위가 감찰팀에 적발되면서 지난해 2월 그에게 ‘가혹한’ 행정처분이 내려졌다. 기동순찰대 반장직에서의 직위해제와 함께 퇴직금 지급 정지 결정이었다. 검찰 기소라는 사법 조치도 뒤따랐다.
그는 이런 처사에 불복하면서 자신의 명예회복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인 주방장이 검찰 조사에 매번 응하지 않으면서 명예회복의 가능성도 제기됐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에서도 파면 취소 결정은 끝내 내려지지 않았다.
이에 좌절한 멘도사는 결국 인질극이라는 극단적인 행동을 감행한 것이다.
2009년 이명박 대통령 북한 조문단 면담
2009년 8월23일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은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북한 조문단의 김기남 노동당 비서(위 사진 왼쪽) 등을 청와대에서 만났다. 북한 조문단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구두메시지를 전달했다.
외신들은 햇볕정책을 수행한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결식을 계기로 이명박 정권 내내 지속돼온 남북간 긴장무드가 해소될 것으로 분석했다.
조문을 마치고 북으로 향하던 북한 김 비서는 한국 언론들에게 “좋은 기분으로 간다”고 말했고, 이 멘트는 “MB 정부 임기 시작 뒤 1년여 동안 이어진 긴장이 완화될 희망이 높아졌다”는 평가와 함께 전 세계로 긴급 타전됐다.
심지어 로이터통신은 이번 회동을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UN의 제재를 받고 고립이 심화된 북한이 껍질을 벗고 나오는 징후”라고 해석했다. 이 통신사는 특히 “북한 경제는 올해 폭우로 인한 농업 피해와 남한의 대북 지원 감소, 유엔 추가 제재 등으로 타격을 입었다”며 “북한이 남한에 손을 내민 가장 주된 이유는 돈”이라고 지적했다.
2005년 북녘 하늘에 울린 ‘꿈’…조용필 평양콘서트
2005년 8월23일 오후6시 평양 유경정주영체육관에서는 남녘 ‘국민 가수’ 조용필씨가 7000여 평양 시민 앞에서 단독 공연을 가졌다. 이만한 규모의 청중을 대상으로 남한 예술인이 북한에서 공연한 것은 분단이후 처음이었다.
한겨레신문 보도(2005년 8월24일)에 따르면, 금빛 웃옷을 입은 조용필씨는 이날 공연 오프닝에서 우주에서 지구로, 다시 한반도로 좁혀오는 영상을 배경으로 공중에서 내려왔다. 장중한 ‘태양의 눈’이란 곡이 무대를 채웠다. 이어 ‘단발머리’, ‘못찾겠다 꾀꼬리’로 흥을 돋웠다. “오기 전에 제 노래를 아실런지, 어떤 노래를 좋아하실런지 무척 고민했습니다. 음악은 남과 북이 같을 거라 생각하고 용기를 냈어요.” ‘친구여’, ‘허공’, ‘돌아와요 부산항에’ 등 그의 대표곡을 이어 가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관객은 굳어있었다. 양복에 넥타이를 멘 남성이나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성이나 곡이 끝나면 박수를 칠 뿐이었다. “제가 음악생활을 37년 했고 나이가 40살입니다” 조씨가 농담을 하자 작은 웃음이 새어나왔다. “박수 한번 주세요!”이제야 휘파람 환호가 간간히 들렸다. 긴장은 조금씩 허물어져가고 있었다.
관객과의 거리가 극적으로 좁혀진 건 그가 북녘 노래 ‘자장가’와 ‘험난한 풍파’를 부를 때였다. 사람들은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북한 노래 100여곡을 들어보고 고른 곡이예요.” 옛 가요 ‘봉숭아’, ‘황성옛터’를 부를 땐 눈물을 훔치는 이들도 있었다. 마지막곡 ‘꿈의 아리랑’에서 환호는 더 커졌다. 이어 “앙코르~” 소리가 터져나왔고 관객은 일어나 긴 박수를 보냈다. “가다가 지치면 쉬어가 더라도, 손잡고 가보자 함께 가보자~.”(‘홀로아리랑’) 이날 공연은 3시간 늦게 서울방송(SBS)에서 방송됐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