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일] 미국, 베트남 침공구실 만들려 통킹만 사건 조작

2010년 오바마 이라크 7년 전쟁 종식 선언

2010년 8월2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조지아주 애틀란타에서 열린 상이군인협회 총회 연설에서 “미국이 이라크에서 전투를 끝내고 8월말까지 전투병력을 모두 철수한다”고 발표했다. 7년 넘게 끌어온 이라크 전쟁의 사실상 종결을 의미하는 선언이었다.

2003년 3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지 7년5개월만이었다. 2009년 1월 오바마 취임 당시의 병력 14만4000명 중 8월말까지 9만여 명의 병력이 이라크를 떠난다고 발표했다. 남은 비전투병력 5만명은 전투 대신 이라크병의 훈련 및 대테러 임무를 지원하다가 2011년 말까지 완전 철군한다는 계획이었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 작전명도 ‘이라크 자유’에서 ‘이라크 새로운 새벽’으로 바뀌었다. 이라크 전쟁은 무수한 죽음으로 점철됐다.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침공 개시 2개월 만에 “임무 완수”를 주장하며 전쟁 승리를 선언했지만 착각이었다. 2012년 7월말 현재까지 8년 9개월간 이라크전으로 미군 4500명과 이라크 국민 11만5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공식 집계됐다. 전쟁을 피해 시리아 등 이웃나라로 떠도는 이라크인은 약 180만 명에 이른다. 미국 침공 전 50만명 수준보다 3배가 넘는다.

미국의 이라크 철수는 전쟁의 끝이 아니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오바마는 아프간이 2001년 9·11 테러를 저지른 알카에다의 본거지이므로, “알카에다와 테러조직이 또다른 공격을 꾸미는 여지를 주는 상황을 미국 대통령으로서 내버려둘 수 없다”고 바로 이라크 종전 선언일에 강조했다.

2012년 6월15일 현재 아프칸에서 사망한 미국인 사망자 수가 2000명을 넘어섰다.

1990년 이라크, 쿠웨이트 침공

1990년 8월2일 이라크가 전격적으로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페르시아 만 전쟁>이다. 이라크군은 탱크와 전투기를 앞세워 침공 첫날 쿠웨이트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고 쿠웨이트를 이라크의 열아홉 번째 주로 병합했다. 이라크는 쿠웨이트가 10년에 걸쳐 원유를 훔쳤다며 24억 달러의 배상을 요구했지만 쿠웨이트가 이를 거절하자 무력침공을 감행했다.

UN은 같은 달 25일 이라크에 대한 유엔군의 무력사용 결의안을 통과시킨다. 이듬해인 1991년 1월17일 이라크가 유엔이 제시한 철수시한을 넘기자 걸프 전쟁이 일어나고 결국 이라크군은 미국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에 패해 쿠웨이트에서 철수한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후 딱 20년 뒤인 2010년 8월2일 미국과의 걸프 전쟁이 끝난다.

1964년 통킹 만 사건

 

1964년 통킹만에서 베트남 침공을 위한 구실을 마련한 미국은 대대적인 해군력을 결집해 북베트남을 폭격했지만, 월맹군의 대공망도 만만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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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8월2일 통킹 만 해상에서 북베트남 해군과 미 해군 사이의 교전이 일어났다. 미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이듬해 북베트남 폭격을 시작하고 전투병력을 베트남에 투입하면서 베트남전쟁이 발발했다. 미국은 대외적으로 북 베트남 해군이 먼저 미국의 구축함을 공격했다고 주장했지만, 베트남은 그 반대라고 반박했다. 한국의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 <매일경제신문>은 미국이 베트남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구실을 만든 자작극이라는 취지로 보도했다. 다음은 보도 전문.


“막대한 원조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 정부의 부패와 무능으로 전황이 날로 악화되자 존슨 미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 개입을 서두른다. 자칫하면 베트남을 잃었다는 비난을 혼자 뒤집어 쓸지 몰라 초조하기까지 했다. 직접적인 군사개입이 필요했으나 구실이 없었다.

1964년 8월2일, 미 정부가 중대발표를 했다. 통킹만 공해상에서 미 구축함 매덕스호가 북베트남 초계정 3척으로부터 어뢰공격을 받았으나 곧 반격에 나서 1척은 침몰시키고 다른 2척은 전투기가 격퇴시켰다는 발표였다. 4일에도 또 공격을 받았지만 역시 북베트남 함정 수척을 침몰시켰다는 발표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 발표는 몇년이 지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1968년의 미 상원 조사에 의하면 미군은 1964년 2월부터 북베트남을 도발하는 비밀작전 `34 A`를 수행해 왔고, 매덕스호는 북베트남 영해 내에서 스파이 활동을 해 왔다는 것이다. 더구나 4일의 발표는 허구이기까지 했다. 1971년 미 국방부 연구보고서 `펜타곤 페이지`에 따르면 미 함선이 먼저 공격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미 함선이 실제로 공격받았는가도 의문시됐다.

어쨌거나 존슨은 통킹만 사건 후 즉각 보복을 명령했다. 5일에는 미군 폭격기들이 북베트남 초계정 기지 4곳과 유류저장시설들을 폭격했고, 7일에는 동남아에서의 자유로운 군사행동을 보장한 `통킹만 결의안`을 상ㆍ하 양원에 상정, 의회로부터 거의 만장일치의 승인을 얻어냈다. 이로써 존슨은 전쟁을 확대할 수 있는 백지위임장을 손에 넣은 셈이 됐고 바야흐로 선전포고 없는 전쟁이 시작됐다. <조선일보>DB조선 ‘오늘의 역사’.”


“미국의 베트남전 본격 개입의 빌미가 됐던 이른바 ‘1964년 통킹만사건’의 정보왜곡 진상이 40여년만에 밝혀졌다고 <뉴욕타임스>가 31일 보도했다.당시 미 국방부는 구축함 매덕스호와 터너조이호가 각각 1964년 8월2일과 4일 통킹만 공해에서 북베트남 어뢰정의 공격을 받았다고 발표하고, 8월5일 보복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북베트남은 매덕스호가 먼저 공격했다고 반박하는 등 사건의 실체는 완전히 해명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이후 역사연구에서도 8월4일의 두번째 공격은 없었던 것으로 판명됐다.

2001년 미 국가안보국 역사연구관인 로버트 한요크는 당시 감청문서 등을 조사한 결과, 감청요원들이 전문을 잘못 해석한 뒤 국가안보국의 중간간부가 이 사실을 의도적으로 왜곡했음을 밝혀냈다. 이는 정치적 동기보다는 실수를 덮기 위한 것이었지만, 존슨 대통령은 이 사실을 모른 채 의회의 북폭 결의안을 촉구하는 데 이를 이용했다.
남베트남 푸바이 감청소와 필리핀 산미구엘 감청소가 8월4일 입수한 북베트남의 전문 내용은 이틀전 상황과 관련해 “두명의 동무가 희생됐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감청요원들은 “두 척의 함정을 잃었다”며 8월4일의 새 교전 결과를 보고하는 것으로 잘못 해석했다.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89)는 이날 <뉴욕타임스>와 회견에서 “전문이 변조된 것도 모르고 의회 증언에 나선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며 관련문서의 공개를 촉구했다.

한요크의 연구결과는 2001년 비밀로 구분돼 국가안보국 내부잡지인 <계간 암호해독>에 실렸다. 그러나 국가안보국 고위층은 이라크 침공을 위한 정보조작과 비교될 것을 우려해 대외적으로 이를 공개하지 않았다고 <뉴욕타임스>는 국가안보국 인사들의 말을 이용해 보도했다. <한겨레신문> 2005년 10월31일치 기사.”


“베트남 전쟁의 원인으로 꼽히는 `통킹만 사건`이 MBC TV의 프로그램 `신기한 TV 서프라이즈`에 소개되면서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

통킹만 사건은 1964년 베트남 동쪽 통킨만에서 미 구축함이 북베트남 어뢰정 3척에게 공격 당한 사건이다. 미국 정부는 이를 계기로 베트남 전쟁에 나서게 됐다고 밝혔지만 이후 통킹만 사건은 미국의 자작극으로 드러났다.

6일 오전 11시에 방송된 MBC TV `신기한 TV 서프라이즈`는 미국 반전운동가인 앨스 버그가 빼돌린 비밀문서를 소개했다.

앨스 버그는 당시 펜타곤 페이퍼를 만드는 그룹의 구성원 중 한 명이었다. 펜타곤 페이퍼는 미국이 1945년부터 1967년까지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에서 벌인 전쟁을 담은 1급 비밀 문서다.

그는 “통킹만 사건은 미국이 베트남전에 참전하기 위해 벌인 자작극”이라는 말을 엿듣게 됐다. 펜타곤 페이퍼는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조작했다고 나와있었다. 이후 앨스 버그는 언론에 이를 공개했으며 미국인들을 놀라게 했다. <매일경제> 2012.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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