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31일] 베트남 마지막 황제 사망
1997년 베트남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 사망
1997년 7월31일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제13대 황제 바오다이(베트남어 B?o ??i, 保大, 1913년 10월22일 출생)가 사망했다.
베트남 안남 왕조의 마지막 제2대 왕이며 베트남 제국의 황제, 베트남국(베트남 공화국)의 국가주석이었다.
바오 다이 황제는 1913년 10월22일 베트남 후에의 황성인 자금성(紫禁城)에서 출생했다. 1922년 황태자로 책봉된 후 학업을 위해 당시의 종주국인 프랑스로 유학 갔다. 부친인 계정제가 1925년 11월6일에 사망해 귀국했고, 1926년 1월8일에 황궁 태화전(太和殿)에서 황제로 정식 즉위했다. 연호를 보대(保大)로 한 후, 유학을 계속하기 위해서 다시 프랑스로 갔다. 6년 뒤인 1932년 바오다이는 귀국했고,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목표로 내정 개혁에 착수했다. 1934년 기독교도로 코친차이나 출신의 완유씨(阮有氏, 남방황후(南芳皇后))와 결혼했다.
태평양 전쟁 말기의 1945년 3월에, 프랑스의 비시 정권이 몰락하자, 일본군이 명호작전(明?作戰)을 실행, 프랑스군을 제압해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베트남 제국을 수립해 황제가 됐다. 당시의 일본 군인 중에는 일본에 망명 중인 기외후(畿外侯)를 베트남 제국 황제를 세우려고 했지만, 남방군(南方軍)이나 제38군은 베트남의 새로운 정권에게 불간섭의 방침으로 군정의 실시나, 친일 정권 건설을 배제하는 걸로 결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오다이는 독립한 베트남의 최초의 원수의 지위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일제의 패망으로 그 직후에 베트남에서는 8월 혁명으로 1945년 8월 23일에 베트남 제정이 붕괴, 바오다이는 보위에서 퇴위했다. 호찌민(H? Ch? Minh, 胡志明)이 베트남 과도 정부 총리로 임시 수반 체제를 성립했다. 같은 해 9월2일 호찌민이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 국가원수로 본격 취임했다. 같은 해 10월2일 호찌민이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전격 취임하자 바오다이는 사실상 완전히 퇴진했다.
바오다이는 호찌민에 의해서 베트남 민주 공화국 정부의 최고 고문에 임명됐다. 그러나 공식 외교 대표단의 일원으로서 중국을 방문할 당시 망명, 1946년 당시 영국의 식민지인 홍콩에 망명했다.
베트남에서는 1946년 프랑스와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사이에 제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했다. 바오다이는 1949년에 베트남에 귀국, 프랑스의 지원에 의해 남베트남의 코친차이나 공화국을 흡수해 수립된 베트남국(베트남 공화국)의 국가원수(국가주석)가 됐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강화 협정으로, 1954년에 제네바 협정이 성립하면서 베트남국은 국제적인 승인을 얻었다.
바오다이는 1954년에 응오딘지엠(Ng? Ð?nh Di?m, 吳廷琰)을 수상으로 임명했지만, 응오딘지엠은 1955년에 베트남 공화국의 정치체제에 대해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그 결과 응오딘지엠은 승리, 베트남 공화국을 대통령제로 이행시켜 국가주석제를 폐지하고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바오다이는 국가원수(국가주석) 직위로부터 퇴임하여 프랑스의 파리에 망명했지만, 베트남으로 귀국하지 않고 프랑스 칸 부근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프랑스 파리의 육군 병원에서 사망했다.
1975년 헬싱키선언 조인
1975년 7월31일 유럽의 모든 국가(알바니아 제외)와 캐나다, 미국, 소련 등 35개국 정상들이 참여한 유럽안전보장협력회의가 헬싱키 선언을 전격 채택했다.
하루 전인 같은 달 30일 시작된 이번 회의는 동서 양진영이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냉전상태로부터 탈피, 긴장완화를 향한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개막됐다.
이 선언은 1973년 7월 제1단계(외무장관 회의), 같은 해 9월부터 1975년 7월21일까지의 제2단계를 통해 준비됐다. 유럽의 안전보장에 관한 10원칙과 사람과 정보의 교류, 경제-과학-기술협력, 재검토회의 개최에 관한 4부로 구성돼 있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