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10월5일은 ‘부산시민의 날’…1592년 그날 역사현장을 가다

용두산공원의 이순신 동상. 뒤에 부산 타워가 우뚝 서 있다. 장군은 1592년 10월 5일(음 9월 1일) 부산포에서 왜선 470여 척 가운데 100여 척을 격파했다. <사진 신동명 기자>


한산도대첩보다 더 컸던 부산대첩 기념해 1980년 제정
북항·초량목 등지 기념공간 없이 이순신대로·이순신동상뿐

[아시아엔=신동명 전 <한겨레> 전국부 선임기자]  “전후 네 차례 출정하여 열 번의 접전에서 번번이 승첩을 거두었으나 장수들의 공로를 논한다면 이번 부산 싸움보다 더 큰 것이 없었습니다. 적들은 간담이 서늘해지고 목을 움츠리며 두려워서 벌벌 떨었습니다.”

1592년 음력 9월1일 임진왜란 중 부산포 해전에서 승리한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국왕 선조에게 올린 ‘장계'(부산포파왜병장) 내용의 일부다. 이 장계에서 이순신은 “이전에는 적선 수효가 많아야 70여 척을 넘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적의 소굴에 470여 척이 늘어서 있었다”며 “이런 가운데서도 위풍당당하게 뚫고 들어가 적선 100여 척을 격파했다”고 보고했다.

이같이 부산포 해전은 1592년 4월 임진왜란 개전 이후 이제껏 이순신이 거둬온 승전 중에서도 이순신 스스로 가장 높이 평가했던 해전이다. 이 해전이 벌어졌던 그날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새벽 일찍 가덕도를 출발해 부산포로 진격하면서 먼저 다대포·송도·남항·초량목 등을 지나며 모두 5번의 전투를 치러 적선 28척을 쳐부쉈다. 이를 부산포 해전과 합해 부산대첩으로도 부른다. 부산대첩은 부산포의 승전만 쳐도 앞서 한산도대첩에서 이순신의 조선 수군이 적선 73척 중 59척을 격침했던 것보다 규모나 전과가 더 컸다.

임진왜란 개전과 함께 벌어진 부산진성 전투에서 순절한 당시 부산진 첨사 정발 등의 넋을 기리는 제단인 정공단. 이곳에 지금은 사라진 당시 부산진성의 남문이 위치했다.

부산은 당시 임진왜란 개전과 함께 일본군이 점령해 조선 침략의 전진기지이자 조선 주둔군 본영으로 삼던 곳이다. 부산포는 일본군이 본국과 긴밀히 연락하며 병력과 군수물자 등을 조달하는 교두보가 됐다. 당시 이곳엔 부산 주둔 일본군 최고지휘관 격인 도요토미 히데카쓰(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카이며 양아들)와 함께 구키 요시타카, 와키자카 야스하루, 도도 다카도라 등 일본의 한다하는 수군 장수들이 다 모여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조선 후기에 일본군이 쌓은 자성대왜성을 보수해 사용했던 부산진성의 서문 금루관.

이에 비해 조선 수군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중심으로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 등이 연합함대를 이뤄 판옥선과 거북선·협선 등 모두 166척을 동원했으나 470여 척에 이르는 일본군 전력에는 턱없이 못 미쳤다. 이런 열세 속에서도 임진왜란 개전 이후 속수무책으로 밀리기만 했던 육지에서의 전황을 뒤엎고 조선 수군이 바다에서 처음으로 일본군 본영에 대반격을 가해 궤멸적인 피해를 안긴 전투가 부산포 해전이다. 이후 일본군은 부산 본영마저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불안감에 떨었고, 1597년 정유재란을 다시 일으키기 전까지 부산 본영과 그 주변 지역에만 웅크린 채 왜성을 쌓고 농성하며 강화교섭에만 몰두했다. 부산포 해전은 사실상 임진왜란을 끝낸 결정적인 전투라고 많은 역사학자가 인정하고 있다.

북항 친수공원의 부산항 해안에서 바라본 부산항대교. 부산포 해전 당시 이순신의 조선수군 연합함대가 저 부산항대교 쪽에 위치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부산포 해전 승전, 즉 부산대첩의 그날, 1592년 음력 9월1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10월5일이 ‘부산시민의 날’이다. 부산시가 1980년 시민의 날을 제정할 때 애초 시정자문위원회는 각계 의견을 수렴해 6개 안을 냈다.

즉 △5월25일(동래부사 송상현 순절·1592년) △10월5일(이순신의 부산포 해전 승전·1592년) △2월27일(근대 부산항 개항·1876년) △8월15일(부산부에서 부산시로 승격·1949년) △8월1일(부산시민헌장 제정·1962년) △1월1일(부산직할시 승격·1963년) 등이 그 안이다. 이중 부산포 해전 승전한 날이 시민들의 가장 많은 호응을 얻어 시민의 날로 최종 결정됐다. 이토록 부산시민의 날로 지정할 만큼 뜻깊은 부산포 해전은 부산에서 얼마나, 또 어떻게 기념되고 있을까?

해전이 벌어졌던 당시 부산포는 부산 동구 좌천·범일동의 조선 전·후기 부산진성이 있던 곳에서부터 현재 한창 재개발이 진행되는 부산항 북항 일대를 포괄할 수 있다. 조선 전기 부산진성은 임진왜란 개전과 함께 일본군에 함락돼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다만 성의 남문 자리에 당시 일본군과 맞서 성을 지키며 싸우다 전사한 부산진 첨사 정발 등의 넋을 기리는 제단 ‘정공단’(부산시 지정기념물 제10호)이 남아 있다.

당시 부산진성을 점령한 일본군은 성을 모두 허물고 근처에 증산왜성과 자성대왜성을 새로이 쌓았고, 그 성벽 일부가 지금도 남아 있다. 부산포 해전 당시 이순신은 부산진성이 적들에게 점령돼 기존 관아와 가옥이 모두 헐리고 그곳에 일본풍 가옥과 담장이 즐비한 것을 보며 크게 통분했다고 장계에 기록했다. 왜란이 끝난 뒤 조선은 이전의 부산진성을 복구하지 않고 대신 자성대왜성을 수리해 부산진성(부산시 지정기념물 제7호)으로 사용했다. 이 후기 부산진성의 서문(금루관) 양쪽엔 성을 새로 수리하면서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2.7m 높이의 돌기둥 두 개가 서 있다. 각각 ‘남요인후’(南徼咽喉) ‘서문쇄약’(西門鎖鑰)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조선 후기 부산진성에 세워진 비석에 ‘남요인후’(南徼咽喉)가 새겨져 있다. “나라의 목에 해당하는 남쪽 국경”이란 뜻이다. 

는데, “(이곳은) 나라의 목에 해당하는 남쪽 국경이요, 서문은 나라의 자물쇠와 같다”는 내용이다. 왜란을 겪고 난 뒤 일본을 크게 경계하며 국경 방어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당대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조선 후기 부산진성의 서문 양옆에 세워진 돌기둥에 “서문은 나라의 자물쇠와 같다”는 뜻의 ‘서문쇄약’(西門鎖鑰)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 성에는 왜구 토벌에 앞장섰던 고려말 장수 최영을 기리는 비각과 사당,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병했던 명나라 장수 천만리의 후손이 세운 기념비 등도 있다. 그런데 정작 부산포 해전의 승전을 기리거나 기념하는 시설물은 찾아볼 수 없다.

부산대교 위에서 바라본 부산항 북항 전경. 432년 전 부산포 해전 당시 일본군 전선 470여 척이 늘어섰을 자리에 지금은 연안 및 국제여객 선박이 정박해 있다.

부산항 북항은 부산시가 2008년부터 노후화된 기존 재래부두를 해양 공원과 크루즈·마리나·랜드마크 등을 갖춘 국제 해양관광 거점으로 재개발하고 있다. 이에 따라 지난해 11월 19만여㎡ 규모의 북항 친수공원 중 18만㎡를 먼저 조성해 개방했다. 이 공원은 경관 수로를 끼고 산책로와 다양한 조경식물·야생화단지·다목적광장 등을 갖췄다. 여기에 부산항 해안과 맞닿고 부산역과도 육교로 연결돼 접근성 좋은 도심 휴식 공간과 관광명소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북항 친수공원. 부산항 해안과 맞닿아 경관 수로를 낀 산책로와 다양한 조경식물·야생화단지·다목적광장 등을 갖추고 있다. 부산역과도 1㎞ 이내 거리로 연결돼 접근성이 좋다.

시민단체 부산대첩기념사업회는 이 북항 친수공원을 432년 전 부산포 해전이 벌어졌던 그날을 기억하고 참뜻을 새기는 공간으로 삼자는 취지에서 ‘부산대첩 기념공원’으로 이름 짓자고 제안했다. 또 부산항 북항 재개발지역 안에 부산대첩 기념관도 짓자고 했다.

부산항 북항 재개발지역 주 간선도로인 이순신대로. 부산항 연안여객터미널과 국제여객터미널을 연결한다. 왼쪽으로 북항 친수공원과 부산 오페라하우스 건축 현장이 보인다.

이에 부산시는 올해 초 북항 재개발지역 주 간선도로를 개통하면서 ‘이순신대로’로 이름 붙였을 뿐 이런 제안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상태다. 부산시의 북항 재개발 계획에 부산포 해전 또는 부산대첩과 관련한 기념관이나 기념공원·광장은 물론 기념비나 조형물 조성은 아예 들어있지도 않다. 이순신대로는 1.6㎞ 길이에 왕복 4~8차로 규모로 개통해, 부산항 연안여객터미널과 국제여객터미널을 연결하고 있다.

부산항을 응시하는 이순신 동상. 이순신 동상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부산항 초량목 어귀의 롯데백화점과 영도 섬이 바라보인다.

이순신의 조선 수군이 부산포로 진격하던 바다 길목이었던 초량목엔 당시 절영도로 불렸던 영도 섬과 육지 사이에 현재 영도대교(부산시 지정 기념물 제56호)가 놓여 있다. 영도대교 육지 쪽 어귀엔 일본을 모태로 한 다국적기업 대형매장 롯데백화점·롯데마트가 자리 잡고 있다. 이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위치의 용두산공원에 이순신 동상이 서 있다. 초량목 주변에서 유일하게 찾아볼 수 있는 부산포 해전 관련 시설물이다.

“그의 동상을 구태여 이곳에 세우는 뜻은 저 임진란 때 왜적이 이 땅에 첫발을 올려놓은 곳이 바로 여기였기로 그날의 고난을 뼈저리게 기억하자 함이요, 또 그가 왜적과 더불어 칠 년 동안 싸우던 중에서도 부산 앞바다의 큰 승첩이 가장 결정적이었기로 그것을 외치며 자랑하자 함이요, 그리고 또 여기가 이 나라의 관문이라 예서부터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워 국토수호의 피어린 정신을 안팎으로 나타내자 함이니”

이같이 동상을 건립한 취지가 동상 뒤편의 동판에 자세히 새겨져 있다. 이 동상은 1955년 12월22일 세워졌다.

해병대사령부 기념비. 용두산공원 안에 한국전쟁 때 해병대사령부가 주둔했던 것을 알 수 있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용두산공원은 일제강점기인 1915년 11월부터 1916년 6월 사이에 조성됐으며, 일제가 정상부에 용두산 신사를 세워 신사참배를 강요했던 곳이다. 한국전쟁 중인 1951년 5월20일부터 휴전 직후 1955년 3월26일까지 4년여 동안 해병대사령부가 주둔했고, 1957년 12월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호를 따 ‘우남공원’으로 바뀌기도 했다. 1960년 4·19혁명 뒤 이순신의 시호를 따 ‘충무공원’으로 이름을 고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그해 8월 부산시의회 결의에 따라 용두산공원으로 원위치했다.

1991년 2월에 세워진 도개식 영도대교 기념비.

영도대교는 일제강점기인 1934년 11월 개통한 부산 최초의 연륙교이며, 상판 일부를 들어올리는 국내 유일의 도개식 교량이다. 다리가 하늘로 치솟는 신기한 도개 장면 때문에 개통과 함께 부산을 상징하는 명물로 떠올랐고, 한국전쟁 때 전국에서 몰려든 피난민들이 흩어진 이산가족을 찾으려 모이는 만남의 장소로도 더욱 유명해졌다.

영도대교 도개 장면. 영도대교가 지난 2013년 11월 확장·복원 뒤 재개통하면서 47년 만에 상판 일부를 들어올리는 ‘도개’를 재개했다. 사진은 영도관광안내센터에 전시된 것이다.

영도대교의 도개는 1966년 9월 교량 밑으로 상수도관을 매달면서 중단했다. 이후 2009년 8월 노후화된 기존 교량을 폐쇄·해체한 뒤 새로이 확장·복원해 2013년 11월 재개통하면서 47년 만에 도개를 재개했다. 과거 하루 한 번 이상 매일 도개했으나 지금은 매주 한 번씩 토요일 오후 2시부터 15분간 도개한다.

초량목의 영도대교와 롯데백화점 광복점. 432년 전 이순신의 조선 수군 연합함대가 부산포로 진격하던 바다 길목이었던 초량목에 지금은 영도대교가 놓이고, 육지 쪽 어귀에 일본을 모태로 한 다국적 기업 매장인 롯데백화점·롯데마트가 자리 잡고 있다.

영도대교 육지 쪽 어귀에 롯데백화점·롯데마트가 들어서게 된 건 영도대교 확장·복원공사를 롯데건설이 공사비까지 전액 떠안아 맡는 조건으로 부산시가 허용했기 때문이다. 이 자리는 일제강점기인 1936년 부산부청이 들어섰던 곳으로, 임진왜란 때엔 일본군의 해안기지나 왜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곳에 있던 부산부청 건물은 광복 후 부산시가 1998년 연제구 연산동의 현 청사로 이전하기 전까지 시청사로 사용했다.

일제강점기 때 부산의 최고 식민 통치기구가 들어섰던 곳에 일본을 모태로 한 다국적 대기업이 다시 들어와 자리잡은 모양새가 됐다. 과거 일제의 식민 지배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워 부산포 해전 승전의 참뜻을 기리는 취지에서도 당시 해전의 중요 길목이었던 초량목 어귀를 그 해전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활용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부산시는 부산포 해전 승전을 기념해 1980년부터 10월5일을 시민의 날로 정해 놓고는 해마다 이날 시민의 날 기념식만 할 뿐 부산포 해전을 기념하는 데엔 무관심했다. 부산포 해전과 관련한 부산대첩 기념식은 부산대첩기념사업회가 2018년 창립 이후 해마다 이날 따로 열어왔다. 그러다 올해 처음으로 기념사업회 제안에 따라 하루 전인 10월4일 부산대첩 기념식을 부산시와 기념사업회가 함께 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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