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르파’···에베레스트 등정의 산역사

셰르파들이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고 있다.

히말라야 등산에서 짐을 나르며 길을 안내하는 산악 부족을 뜻하는 ‘셰르파(Sherpa)’는 1921년 첫 에베레스트 원정 이후 ‘등산’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됐다.

“1921년의 첫 에베레스트 원정에는 할아버지를 포함한 7~8명의 셰르파가 동행했다”고 전 네팔 등산협회(NMA) 회장인 앙 치힐링 셰르파는 회고했다.

하워드 벨리 대령이 이끄는 에베레스트 첫 원정대는 당시 네팔이 세상에 개방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인도 다르질링을 출발점으로 삼았지만 네팔의 셰르파를 짐꾼으로 데리고 갔다. 그 원정대에 포함됐던 조지 말로리는 1924년 세 번째 원정 때 하산 중 사망했다. 당시 그가 정상을 정복하고 내려오다 사고를 당했는지는 아직도 확인되지 않았다.

네팔이 외부세계에 개방된 것은 1949년이었다. 그때까지는 어떤 에베레스트 원정도 네팔에서 출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모든 원정은 티베트에서 출발했는데, 꼭 네팔의 셰르파들이 동행했다.

엘릭 십튼이 1949년 에베레스트가 있는 쿰부 지역에 도착하기 전인 1921년, 1922년, 1924년, 1933년, 1935년, 1936년에 여섯 번 에베레스트 원정이 있었는데 모두 티베트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이 모든 원정에서 셰르파를 짐꾼으로 고용했다. 산에서 사망사고가 잇따르자 티베트 달라이 라마는 1924년부터 9년간 에베레스트 원정을 금지하기도 했다.

네팔에서 에베레스트 원정이 정식으로 이뤄진 것은 네팔이 세계에 개방된 지 2년째인 1951년부터였다. 1953년 로드 헌트가 이끄는 원정팀의 셰르파 텐징 노르게이와 뉴질랜드의 에드몬드 힐러리경이 8,848m 정상에 첫발을 디딤으로써 에베레스트 정복의 역사가 시작됐다.

'아파' 셰르파는 에베레스트를 21번 올랐다.

이후 약 6,000번의 에베레스트 등반이 있었는데,?가장 많이 오른 사람들은 셰르파였다. 그들은 에베레스트 등정과 관련해 여러 기록을 세웠다. 지금껏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3,700명 중 아파(Appa)라는 이름의 셰르파는 모두 21번을 올랐다.

푸바 타시 셰르파는 19번을 올랐고 눈 표범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안글리타 셰르파는 10번을 올랐다. 이미 숨진 선다래 셰르파는 처음으로 5번을 올랐고 나왕 감부 셰르파는 두 번 등정한 첫 기록을 남겼다.

텐징의 아들과 손자도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하면서 이들은 3대가 에베레스트를 오른 첫 가족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아들인 잠링 텐징은 1996년에, 손자인 타시 왕축 텐징는 1997년 등정에 성공했다.

밍 키파 셰르파는 2003년, 15살 9개월의 나이로 등정에 성공해 최연소 여성 등정자로 기록됐고 템바 트시라 셰르파는 2001년, 16살에 등정해 최연소 남성 등정자가 됐다. 파상 람무는 1993년 지구 최고봉에 선 최초의 네팔 여성이었지만 하산 중 사망했다.

앙 치힐링 셰르파에 의하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3,700명 중 1,900명 정도가 셰르파인데 그 중 8명은 여성이다.

올해도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르려는 사람들의 도전은 계속되고 있다. 올 들어 지금까지 정상에 오른 350명 중 205명이 네팔인이었고 이중 190명은 셰르파였다.

셰르파들의 기록은 이렇게 이어진다. 같은 마을에 사는 셰르파 13명이 5월26일 같은 날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았고, 카미 셰르파는 올들어 8일간 정상을 3번 정복했다. 그러나 카미의 이 기록은 3번 모두 베이스 캠프에서 출발하지 않아 기록으로 인정되지 못했다. 앙 치힐링은 “정상 150m 아래 설치된 제4캠프에서 출발하면 쉽게 정상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셰르파들은 네팔 히말라야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길게 뻗은 고산지역에 살고 있다. 티베트 불교를 믿는 그들은 해마다 축제도 열면서 돈 씀씀이가 호쾌하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셰르파들은 아직도 가난하다. 안 치힐링은 “셰르파들은 마시고 즐기는 데 돈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일부다처제는 수 십년 전까지도 많았지만, 교육받은 사람이 늘면서 지금은 사라졌다.

수 십년 전까지 대부분의 셰르파들은 등산팀의 포터로 일했다. 그러나 이 히말라야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를 가져다준 등산 붐 덕택에 지난 몇년간 이들은 프로 등산가나 관광업 종사자로 변신했다. 요즘은 많은 셰르파들이 카트만두에 살면서 트레킹이나 관광 가이드로 일하고 있다.

앙 치힐링은 셰르파 인구를 38만 명 정도로 추산했다. 그는 “셰르파의 1/3은 현재 인도나 미국 등 외국에서 살고 있는데 미국의 셰르파 인구는 5만 명 정도이며 뉴욕에 사는 셰르파 인구만 1만 5,000명에 이른다. 관광업 등의 경력을 가진 대부분의 셰르파들은 미국이나 호주에 자리를 잡았다”고 설명했다.

앞서 말했듯 셰르파 없이 히말라야 고봉들을 등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네팔의 어느 산을 등정하더라도 현지 셰르파들의 도움은 필수다. 네팔에 있는 8,000m가 넘는 14개의 봉우리는 모두 셰르파나 셰르파의 도움을 받은 외국인에게 처음으로 정복됐다. 1954년 초유봉, 1955년 마칼루봉, 1956년 마나슬루봉 등 주요 봉우리의 첫 정복에는 셰르파들이 포터나 안내자로 동행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셰르파들이 목숨을 잃었다. 또 올들어 눈표범의 장남인 카르상 남그얄이 에베레스트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과거에는 원정팀 리더의 허락이 있어야만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앙 치힐링은 “많은 경우 등산가들은 그들의 정상 정복이 셰르파의 도움으로 이뤄졌다고 폄하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셰르파들이 정상에 오르지 못하게 막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제약이 없어져 어떤 셰르파도 자기가 원하면 정상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요즘 ‘셰르파’는 히말라야 고봉 원정에 나서는 등산가를 돕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일반 용어가 되었다. 그래서 ‘셰르파’가 되기 위해 셰르파족으로 태어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번역 선재훈 기자 sword@theasian.asia

*원문은 아시아엔(The AsiaN) 영문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http://www.theasian.asia/?p=19374
???? http://www.theasian.asia/?p=19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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