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서만수 목사…’이슬람’ 인도네시아에 ‘기독교’ 뿌리내린 선교사

서만수 목사와 저서 <가르치며 증거하며 섬기며>와 그가 1972년 설립한 자카르타한인연합교회 행사 등의 사진

[아시아엔=정무웅 자카르타 한인연합교회 원로장로, 코린도 부회장 역임] 9월 16일이면 자카르타 한인연합교회 서만수 목사님이 소천하신지 14년이 됩니다. 지금도 자카르타 한인연합교회 성도들은 목사님을 많이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서만수 목사님은 지금으로부터 52년 전인 1971년 이슬람권 선교를 생각지도 못했던 때에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선교사로 파송됐습니다. 목사님은 인도네시아 오지선교를 시작으로 1972년 7월 2일 자카르타 한인연합교회를 설립하여 인도네시아 선교의 전진기지로 삼았습니다.

자카르타한인 연합교회는 그 이후 2003년 7월 6일 교회설립 30주년 기념으로 새 성전을 건축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금년에 교회설립 51주년을 맞았습니다.

목사님은 38년 동안 인도네시아 사역을 통해서 한인선교와 인도네시아 3천 촌락에 교회를 개척하는 사역에 온 정성을 기울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우리 후세들에게 이 사역을 물러주었습니다.

서 목사님은 목회사역을 하는 동안 우리 성도들을 무척 사랑했습니다. 자녀가 없으신 목사님 내외분은 모든 성도들이 내 자식이라고 하면서 어린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온 성도들에게 깊은 사랑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자카르타 한인연합교회를 거쳐간 수많은 믿음의 가족들은 지금도 목사님의 사랑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목회 중에도 인도네시아 전역을 직접 다니면서 교회를 개척하고 성전 봉헌에 직접 참석해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지구촌 최대의 이슬람 나라인 인도네시아 선교에 큰 획을 그은 선교의 방향을 보여주고 하나님 곁으로 떠났습니다.

복음의 깃발을 위해 좁은 교단과 교파의 벽을 뛰어넘어 모든 선교사들을 어루신 모습은 선교사들의 본이 되었으며 자카르타 한인연합교회의 모든 식구들을 선교의 대열에 사명감으로 동참시킨 사례는 한국 해외선교역사에 길이 기록될 것입니다.

서만수 목사님은 자카르타 한인연합교회 내에 4년제 스틴신학교를 설립하여 현지인 기독교 지도자 양성에 힘을 기울여 오던 중에 인도네시아 청년 지도자 양성을 위한 교육사업을 꿈꾸고 성도들의 헌금으로 조성된 기금을 사용하여 두란노 종합대학교 부지를 구입해 주었습니다.

지금은 이 자리에 유치원에서 부터 초중고교와 자카르타 국제대학교가 세워져 선교사들에 의하여 운영되고 있습니다. 서만수 목사님 기념관에는 목사님의 흔적을 볼 수 있는 여러 기념품과 사진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서만수 목사님을 추모하면서 우리 모두에게 맡겨주고 가신 인도네시아 선교와 인도네시아 지도자 양성에 힘을 기울여 나갈 것을 다짐하는 계기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1990년대 자카르타 한인연합교회 앞에서 서만수 목사(앞줄 왼쪽 두번째)와 필자(오른쪽)


서만수 목사는?

1939년 평양에서 출생, 6.25전쟁 중 월남해 서울에 정착, 둔촌교회 전도사 등을 거쳐 목사가 된 후 1971년 인도네시아에서 한인 첫 선교사의 길을 시작, 인니 최초 한인교회와 한인학교를 세워 종교를 초월한 한인사회의 구심점을 만들었다.

1971년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섬에서 선교를 시작, 이듬해 인도네시아 최초의 한인연합교회를 세웠다. 1974년 개원한 한인유치원과 이듬해 개교한 자카르타 한인학교는 한인교육기관의 효시가 됐다.

서 목사는 평소 “나는 선교사입니다”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며 외국인이 직접 선교에 나서기 어려운 현지 사정을 고려해 스틴신학교를 세워 현지인 선교사를 양성, 파견했다. 이로써 현지에서의 충돌을 피하면서 인도네시아 오지에 384개의 개척교회를 세웠다.

서만수 목사는 인도네시아 사역 20년 회고록 <남방에 심는 노래>, 시집 <둥개야!>, 선교 30년 기념 사례집 <남방에 피는 꽃> 등의 책을 냈다. 2009년 9월 16일 소천한 서만수 목사는 자카르타 외곽 까라왕 바라트(Karawang Barat) 소재 타만 께낭간 레스타리(Taman Kenangan Lestari) 공원묘지에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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