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용 목사의 ‘기도란 무엇인가?’
2023년 7월 17일자 <중앙일보>에 백성호 기자의 ‘마음 챙기기 궁 궁 통통’에 강원용 목사가 호통친 기도 ‘기독교 기도, 그런 게 아니다’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이를 재구성해 본다.
기도란 무엇인가? “신이나 절대적 존재에게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기를 빎. 또는 그 의식”을 이른다. 사람이 출세하여 세상을 살아가기로 하면 자력(自力)과 타력(他力)이 같이 필요하다. 그래서 자력은 타력의 근본이 되고, 타력은 자력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강원용(1917~2006) 목사는 1988년 무렵,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총리직을 제안 받았다. 그러나 강 목사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하지만 정치권에서 조언을 요구하면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민심은 천심이라고 여겼다. 국민의 마음은 곧 하늘의 마음이다.” 강 목사는 국민을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다.
첫째는 권력가라면 무조건 따르는 사람이다. 둘째는 사사건건 반대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이다. 셋째는 잘하는 건 칭찬하고, 잘못하는 건 비판하는 국민이다.강 목사는 셋째 유형의 국민을 ‘호민(護民)’이라고 불렀다. 셋째 유형이 제대로 된 국민이다. 이들의 지지를 받으면 못 할 일이 없다. 대신 그들이 등을 돌리면 별 짓을 다 해도 안 된다.
강원용 목사는 우리 사회의 존경받는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통령에게 조언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마다 강 목사는 되풀이해서 이 조언을 해주었다.
그 말에 역대 대통령은 감명을 받았다. 그렇지만 실천하진 않았다. 결국 호민 계층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자기들끼리 소위 코드 맞는 사람들끼리만 정치를 했다. 거기에 무슨 존경이 가며, 국민이 따르겠는가.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시민사회 대표들이 2003년 2월 26일 서울 신라 호텔에서 반전·반핵과 평화를 위한 성명을 발표했다.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그다지 없어 보인다.
그 뒤에도 정권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호민을 외면하고 코드를 앞세운 끼리끼리 정치를 하는 모습은 여전하다. 그러니 강 목사의 염려와 해법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형국이다.
강 목사는 사회를 향해서도, 신앙을 향해서도 쓴소리를 마다치 않았다. 심지어 우리나라 기독교 신자들의 기도에 대해서도 뼈아픈 지적을 했다. “기독교 신자들이 기도에 대해서 도무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어떤 때 보면 무당 샤머니즘처럼 복을 달라고 빈다. 기독교의 기도는 그런 게 아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쉽지 않은 일이다. 기독교 목사가 기독교 내부를 향해서 뼈아픈 소리를 쏟아내는 일 말이다. 그런데 강 목사는 주저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교단 내의 자기 입장보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훨씬 더 중시했기 때문이다.
강 목사는 프랑스의 초교파 수도공동체 ‘테제마을’에서 경험한 기도를 언급했다. “거기에서는 기도가 ‘오~주여, 내게 오시옵소서’다. 그런 거다. 그러니까 지금 오시는 걸 받아들이고 그에 대해 응답을 하는 거다. 그게 나와 하나님 사이의 기도다. 요란스럽게 소리 지르고 징징 울고 하는 건 아니다.”
강 목사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기도에 대해 말했다. “우리의 기도는 이래야 하지 않나. 어떻게 하면 내가 저 사람들을 위해서 살 수 있습니까. 내가 저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기도해야 하지 않겠나.”
강원용 목사는 과학과 종교를 이분법적으로 가르지 않는다. 오히려 과학적 세계관을 적극 수용하는 자세를 취한다. 과학의 울타리가 신의 울타리 안에 있음을 안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이 무한대의 우주에서 신은 과연 어디에 있는 걸까.’ 이 물음에 강 목사는 답했다. 신이 인간사의 일거수일투족을 일일이 지켜보며 간섭하는 방식이 아닐지도 모른다며 말이다.
“어떤 노인(신)이 한 별에 앉아서 ‘이놈이 저것 하고 있구나’ ‘누구는 밥을 먹고 있구나’ 하는 식으로 볼 수는 없다. 탁자 위의 꽃을 보면 어떤 에너지가 있다. 거기서 생명이 나오고, 거기서 아름다움이 나온다. 근원적인 하나의 사랑도 그런 에너지다. 그 속에 생명이 있고, 진리가 있고, 빛이 있다.”
어떤가? 기도는 이렇게 올려야 하지 않을까. 기도는 즐거운 일 당할 때는 감사를 올리고, 괴로운 일을 당할 때는 사죄를 올리며, 결정하기 어려운 일을 당할 때는 결정될 심고와 혹은 설명 기도를 올려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