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용의 ‘Bravo My Life’ ①] “장애인 복지는 기회와 일자리 제공해 당당한 사회구성원으로 맞이하는 것”

“두만~강 푸른~물~엔~~노~ 젖~는~ 뱃~사~공~~”

눈물 젖은 두만강 노래를 구성지면서 맛깔스럽게 부르며 무대에 등장한다. 이어 90세가 넘으신 할머니가 영상을 통해 모습이 드러내면서 동시에 “사~공에~~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깊이~~” 구수한 노래가 흐른다. 극심한 치매로 요양병원에 계시는 할머니는 가사 한 글 자 틀리지 않고, 1절을 부르셨다.

2008년 하늘나라로 가신 할머니는 이철용 선생의 어머님이시다. 뒤이어 아들 이철용님이 구음으로 2절을 부르는데 절규하듯 울음인지 구음인지 가늠하기가 어려울 정도의 구음 소리가 심장을 파고 들어 후볐다. 3절까지 노래를 마쳤다. 76세 노인이 부르는 소리는 노래가 아닌 절규였고 통곡이었다. 구음 소리는 마치 바람에 이는 대나무 숲 속에서 새어나오는 흐느끼는 곡소리 같았다. 두곡을 마치고난 뒤 토크할 자리에 앉는다.

진행자: 이철용 선생님, 나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오랫만에 오셨으니 오신 분들에게 한 말씀 하시지요.

이철용: 안녕하세요. 인사 올립니다. 먼저 귀한 자리를 마련하고 준비해주신 한국장애인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이하 장예총) 배은주 상임대표님 책 읽어주는 집사로 널리 알려진 에이블방송 백종환 대표님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또 한예총 안이문 정책위원장님 김종우 공연기획실장님과 음악업무를 총괄하는 양기주 감독님에게 두손모아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이 무대는 방금 거명한 여러분의 땀과 시간 그리고 헌신적인 희생과 사랑으로 꾸며진 아름다운 사랑이 흐르는 무대입니다.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정중하게 드립니다.

진행자: 노래를 잘 부른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마는 지금 들어보니까 완전 가수입니다. 어머니에게 노래를 배우셨다고 하는데 어떻게 배우셨는지요?

이철용: 과찬의 말씀을요. 노래 부르니까 가수는 가수지요. 웃자고 드리는 말입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노래를 좋아하신 어머니 따라 그냥 불렀고 그렇게 배운 거에요. 어머니가 자주 부르신 애창곡은 황성옛터, 눈물 젖은 두만강, 목포의 눈물, 찔레꽃, 비내리는 호남선, 한만은 대동강아 등등입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 겁니다.“

진행자: 네 그렇군요. 대한민국 헌정 사상 장애인으로서 최초로 지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셨지요? 당시 국회 진출하신 소감과 정치권으로 들어가신 배경을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철용: 상대할 후보가 강력한 후보라 내심으론 뜨악했습니다. 상대후보는 배성동 후보였는데요, 서울대학 정외과 교수, 당시 여당정책의장, 2선 의원 등 경력과 학력이 초등학교가 전부인 저와는 상대가 안 됐습니다. 그런 조건이었지만 저는 저를 믿는 것이 있습니다. 어려우면 밀어붙이고 복잡하면 뚫고 가려는 밀어붙이는성향이 강하고 근성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도전할 때 ”진짜 안될까?“라고 덤빕니다. 당시 정치상황은 안팎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DJ, YS 양김 단일화를 놓고 단일화파, 지지파,  비지파(비판적 지지)등 시끄러울 때입니다. 저는 비지파로 분류돼 공천을 쉽게 받았는데요 웃기는 건 입당원서도 공천신청도 내 손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한참 뒤 들었습니다만 고인이 되신 이문영교수(고대 행정학)님이 대신 공천신청, 입당원서를 쓰셨답니다. 고인이 되신 문익환 목사님과 이문영 교수님 두분이 적극적으로 저를 입당시켰고 공천을 받도록 도움을 주셨습니다. 입당원서를 작성하고 제출해야 공천도 받고 정치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무식이 용감’이라고 들이댄 셈이지요. 야당은 단일화로 몸살을 앓고 여당은 전두환 5공정권에서 노태우 6공정권으로 넘어가는 시기였고요. 노태우를 꼭두각시로 내세우고 뒤에서 섭정을 하려는 전두환의 야욕이 먹히느냐? 안 먹히느냐?를 놓고 물밑에서 조용하게 저울질하던 때였고요. 결론은 노태우 6공정권이 들어섰고 그 뒤 치러진 제13대 총선에서 여소야대 국회가 됐습니다. 과거 유신 시절 유정회가 판을 치는 세상은 아니므로 여소야대를 수용하고 대화와 타협으로 정책을 끌어내야 하는 헌정 사상 초유의 여소야대라는 국회가 탄생되니 그동안 쉽게 넘어갔던 여러 가지 문제들이 독주를 막는 야대에게 발목이 잡혀 야당의 눈치를 보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여소야대가 합의하여 만든 것이 5공 청문회/ 부정선거조사특조위/ 의문사진상조사위 등이었습니다. 그 덕분으로 청문회 스타가 나왔고 후에 대통령까지 이어져 대한민국 정치지형이 바뀌고 새로운 정치역사가 기술되었고 그 여파로 대통령탄핵 그리고 검찰총수가 대권을 잡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진행자: 정치권에 진출할 때는 쉽게 들어가셨는데 그만두시는 과정이 시끄러웠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간관계상 짧게 답변 부탁드립니다.

이철용: 저는 정치체질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전두환 청문회 때 제가 증언대로 뛰어나가 ”살인마 전두환! 증언 똑바로 해. 너는 살인마야. 광주양민을 학살한 살인마 전두환! 살인마 전두환! 살인마 전두환!“이라고 외쳤습니다. 그 이유는 몇가지가 있는데요 첫째. 증언하기 전에 증언대에 서서 오른손을 들고 증인선서를 해야 하는데 생략하고 넘어갔습니다. 둘째. 증언을 하려면 질문을 받아야 하는데 서면으로 질문을 받았다는 일언반구도 없이 상의 안주머니에서 달랑 증언서를 꺼내 읽어내려갔습니다. 셋째. 조폭보다 더 오만방자하게 거드름을 피우면서 증언대로 나와 증언을 국어책 읽듯 읽어내려갔습니다. 불난데 기름을 부은 대목은 발포명령을 자신이 내린 사실도 없으며 발포명령은 자위권 차원 운운하기에 뛰어나가 살인마라고 외친 겁니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인데 말씀드리지요. 1989년 12월31일 청문회가 열렸습니다. 청문회가 열리기 보름 전 그러니까 1989년 12월15일 1노3김(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저녁 회동을 합니다. 이들은 자정 너머까지 술잔을 나눴습니다. 화기애애 술자리를 마치고 돌아갔습니다. 제가 살인마 전두환이라고 외쳤던 5공청문회를 12월31일에 하기로 하고 면죄부를 주기로 합의한 것입니다. 역사의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는 웃기는 술판이었지요. 그 사실을 우연하게 제가 듣게 됐습니다. 저는 5공 청문회 위원도 아니고 부정선거와 의문사진상조사특별위원이었습니다. 국회의원 신분이라 5공청문 위원이 아니지만 청문회장 입장이 가능했지요. 이미 저는 5공청문회가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린 쇼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 자격으로 전두환에게 살인마라는 형량을 선고를 내린 것입니다. 그 일로 저는 정치생명이 조금씩 시들해져 갔습니다. 그러나 후회는 일도 없습니다. 오히려 떳떳합니다.

진행자: 정치이야기는 끝도 한도 없으니 이만 줄이고요. 장애인 문제를 묻겠습니다. 장애인복지법을 전면개정했고 고용촉진법을 제정하는데 앞장서셨는데 당시 상황을 말씀해주시지요.

이철용: 제가 국회의원 당선되고 첫 등원하는 날입니다. 소위 민의의 전당이라는 국회에 장애인 편의시설이 전무한 겁니다. 그래서 휠체어를 빌려 타고 계단 앞에서 소위 1인 시위를 벌였습니다. 국회 경비분들이 오셔서 업어드리겠다고 등을 보이길래 호통을 쳤습니다. 그 뒤 선배 동료 국회의원 130여명의 서명을 받아 본관 정문계단에 편의시설을 설치하는 것을 시작으로 연달아 편의시설바람이 불었습니다. 새로 짓고 있던 의원회관도 건축 설계도면을 수정하였고, 곳곳 출입문에 편의시설을 갖췄습니다. 정부부처 및 정부공공 기관에 국정감사를 다닐 때마다 먼저 편의 시설을 살폈고 편의시설이 설치안됐으면 호통을 쳐 다음에 찾아가 설치여부를 확인하곤 했습니다. 한사람의 힘이 많은 영향을 끼칩니다. 그래서 제가 늘 주장하는 것은, 여든, 야든, 장애인들이 국회에 많이 진출하라고 주장을 펴는 것입니다. 국회의원은 움직이는 입법기관입니다. 당시 장애인 관련법은 무늬만 그려넣은 생색내기였습니다. 심신장애자복지법이라는 명칭의 복지법이 전부였습니다. 그조차 의무조항이 아닌 권고조항 일색이었고요. 우선 명치변경부터 손을 봤습니다. 당시 기억을 소환해 보자면 이런저런 항변과 요구를 했는데 떠오르는 대로 말씀드리지요. 장관을 다그칩니다. 능력장애와 신체장애와 동일시 하는 것이냐? 장애인 된 것도 억울한데 놈자는 왜 붙였느냐? 장애인에게 굳이 놈자를 붙여야 속이 시원하냐? 의무는 없고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 있으나 마나한 복지법을 왜 쥐고 있느냐? 장애인복지를 하자는 것이냐? 말자는 것이냐? 장애인 복지에 대한 의지가 없으니 해마다 예산을 쥐꼬리만큼 짜서 궁색하게 만드는 배짱은 도대체 누구머리에서 나온 것이냐? 당신들 솔직하게 말해봐라 장애인복지를 할 의지가 있는지를? 구색 맞추기용으로 만든 것이냐? 내가 보기엔 복지부엔 복지할 의지가 전혀 없는 분들만 모인 것 같다. 시간이 돈이다. 시간만 가라. 장애인 복지는 꼭 내가 해야만 하나라는 생각만 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그 바람에 싸움닭이라는 별명을 덤으로 얻었고요. 장애인복지는 동정과 시혜가 아닙니다. 장애유형별로 직업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준 뒤 일자리를 주는 것이 진정한 복지입니다. 일하고 일한 만큼 돈을 받고, 돈 받은 만큼 세금내고, 당당하게 사회구성원으로.. 문화주체자로 살아가도록 해주면 굳이 장애인 생활지원금 등 복지를 보편적 선별적 운운 복잡하게 끌고 가지 않아도 됩니다. 이런저런 강력한 주장을 펼치면서 장애인고용촉진법을 제정하는 일에 앞장을 섰습니다.

진행자: 장애는 언제 당하셨습니까?

이철용: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아버님이 하늘나라로 가셨는데 결핵으로 가셨습니다. 그때 결핵균이 저의 다리로 들어와 결핵성 관절염으로 지체장애3급이 됐습니다. 어머니는 30살에 혼자 되셨고 저는 아버지 얼굴도 아버지라는 말 한마디 못하면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고요.

<꼬방동네 사람들> 포스터. 위에 원작가 이동철은 이철용의 당시 이름이다.

 

진행자: 학력이 초등학교가 전부라고 알고 있는데 소설 그것도 베스트셀러로 영화까지 만들어진 장안에 화제가 되었던 ‘어둠의 자식들’을 비롯해 ‘꼬방동네사람들’ ‘들어라 먹물들아’ ‘오과부’ 등을 연달아 내셨습니다.

이철용: 초등학교까지만 나온 것을 부끄럽게 여기거나 열등감을 느껴본 적은 없습니다만 간혹 ‘공부좀 할걸.. 공부했으면 조금 더 봉사할 여지가 넓고 좋았을텐데’라는 생각을 한 적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후회한 일은 없습니다. 저에게 ‘문학수업은 언제 받았느냐?’ ‘습작은 언제부터 했느냐?’라고 묻는 분들이 예상외로 많습니다. 특히 기자분들이 인터뷰를 할 땐 단골 질문 메뉴이기도 하고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무당은 강신무와 세습무가 있습니다. 그렇듯 저를 무당으로 보면 강신무에 해당됩니다. 세습무는 노래와 춤을 정식으로 배워 굿을 펼치는 분들이고, 강신무는 어느날 갑자기 시름시름 앓기도 하고 중얼중얼 혼잣 말을 하기도 하고 이유없이 몸이 아프면서 우환이 빈번하게 생기는 등 이런저런 사연들에 잡혀서 몸살을 앓는 분들입니다. 소위 무병이 걸린 것이지요. 내림굿을 해서 무당이 되는 경우/ 병을 고친 경험을 하는 경우 등 다양한 결과를 맞이합니다. 그런 시각으로 보면 저는 분명 강신문학입니다. 도저히 내가 이 소리를 안하면 죽을 것 같고 죄를 짓는 것 같은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생각은 점점 깊어져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지곤 합니다. 그럴 때 술꾼들이 아침 해장국으로 속풀이 하듯.. 한맺힌 여인들 살풀이 춤추고, 저같은 사람 하고 싶은 말 몽땅 털어놓으면 후련하고 홀가분하게 언제 속앓이를 했지? 뭐 이런 면에서 보면 강신문학이 맞지 않을까요?

진행자: 말씀 다 들으면 노래하실 시간도 없을 것 같습니다. 다음 부를 노래는 직접 작곡도 작사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음악공부를 하셨나요?

이철용: 저는 악보도 모릅니다. 휘파람으로 작곡을 한 곡이 ‘하얀 눈물 꽃’이고.. 어머니의 험난한 삶을 생각하면서 눈물로 지은 노랫말이 ‘조각배’ 입니다. 제가 작사한 ‘조각배’ 노래는 꼬방동네사람들 영화주제곡으로 김영동님이 작곡을 한 노래입니다. 노래연습을 많이 하면 음악전공자가 아니여도 작곡도 작사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진행자: 자 여러분 이철용님의 노래를 듣는 시간입니다. 어머니를 생각하고 지으신 ‘조각배’, 작곡 작사를 하신 ‘하얀 눈물 꽃’ ‘나쁜사람이야’를 청해 듣겠습니다.

이철용: 제가 불치병 판정을 받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잠을 이루지 못할 땐 자동차를 몰고 한적한 것으로 드라이브를 합니다. 어느날 영종도를 가는데 짙은 안개가 자욱했습니다. 비상 라이트를 켜고 천천히 차를 몰고 가는데, 가로등 사이로 안개가 살랑살랑 너울너울 춤을 추는데 마치 살풀이 춤을 추는 듯 보였습니다. 저의 눈에는 살랑살랑춤/ 너울너울춤이 아닌 하늘로 올라가는 하늘하늘춤으로 보였습니다. 하늘하늘 춤은 이렇습니다. 이 땅위에서 정화조/하수구/ 분수대/ 하수종말처리장/목욕탕/세탁기/ 오물 등등 오만가지 오물과 섞여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운 좋아 때를 만난 물이 세상에서 더럽혀진 모든 오물들을 벗어버리고, 비우고, 털어내고, 안개로 쏙 빠져나와 하늘하늘 춤을 추면서 세상에 대한 원망도, 후회도 없이, 하늘로 향해가는 안개는 하얀 옷을 입은 천사같았습니다. 시각장애인들이 짚고 다니는 하얀지팡이처럼 보였고요. 이를 보는 순간 저 자신도 모르게 ”물처럼 살리라“ 다짐을 했습니다. 물은 헤어지는 것 같지만 안개가 되든, 뭐가 되든, 물은 물끼리 모입니다. 물은 겸손해서 아래로 아래로 흘러가 바다로 모입니다. 물은 어떤 상황이라도 맞닥트리면 피하려거나 원망하지 않고, 순응하고, 적응합니다. 변화에 능수능란합니다. 물처럼 안개처럼 하늘하늘 춤을 추면서 살겠노라 다짐하면서 하얀 눈물 꽃이라는 제목을 달아 지었습니다.

곧 이어 이철용 선생이 ‘조각배’ ‘하얀 눈물 꽃‘ 두 곡을 연달아 부르는데, 열창하는 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울려 퍼진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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