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조언

양약고구이어병, 충언이이어행


역대하 18장

“그는 내게 대하여 좋은 일로는 예언하지 아니하고 항상 나쁜 일로만 예언하기로 내가 그를 미워하나이다”(대하 18:7)

칭찬을 가식적으로 하는 경우는 있어도 욕을 가식적으로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건 사람에게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내 귀에 거슬리는 얘기는 대체로 진심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귀에 거슬립니다.

역대하 18장에 보면 아합 왕에게 조언을 하는 두 명의 선지자가 나옵니다. 한 명은 시드기야이고 한 명은 미가야입니다. 누가 진짜 선지자일까요? 예언하는 모습만 봐서는 누가 진짜이고 누가 가짜인지 구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아합은 미가야보다 시드기야를 더 좋아했습니다. 왜냐하면 시드기야의 메시지가 언제나 아합 자신의 뜻과 잘 맞아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아합은 하나님의 뜻이 궁금했던 게 아니라 자신의 뜻에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해줄 근거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시드기야와는 반대로 미가야는 아합이 가고자 하는 방향에 늘 걸리적거렸습니다. 제3자의 관점에서는 미가야가 진언을 하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는데, 당사자의 관점에서는 진위 구별이 상당히 어려운가 봅니다. 내가 바라던 바와 하나님의 뜻이 다르지 않다는 메시지를 듣는다면 당연히 그 메시지를 진리라고 믿고 싶지 않겠습니까?

살다 보면 마음에 담아두고 쉽사리 꺼내지 못하는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상대의 마음을 다치게 할까 조심스러운 것입니다. 또는 내가 손해나 피해를 보게 될까봐 조심스럽기도 하고, 둘 사이의 관계가 어려워질까봐 두렵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누군가 나에게 어렵게 그 얘기를 꺼냈다는 것은 많은 것을 각오하고 말문을 열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저 그 말의 내용이 내 기분에 거슬린다고 그를 미워할 게 아니라 오히려 귀담아 들을 일입니다.

쓴소리는 듣는 사람도 힘들지만 하는 사람도 무척이나 힘이 듭니다. 그래서 아무나 해주지 않습니다. 적당히 웃고 지나가는 게 쉽기 때문입니다.

물론 심사숙고도 없이 가볍고 거칠게 내뱉는 말들도 있습니다. ‘다 너를 위해서야’라는 명분을 가지고 자신의 발언을 합리화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 심기가 매우 불편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마음에도 없는 좋은 소리를 백 번 듣는 것보다 훨씬 유익한 것 아닐까요? 적어도 마음이 들떠서 스스로에 대해 착각하지는 않을테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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