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수 칼럼] 재능기부와 청출어람

2023년 2월 하순 라오스에서 열린 제1회 DGB배 동남아야구대회 경기장에서 이만수 감독(오른쪽 셋째)와 라오스와 베트남에서 야구 전파에 나서고 있는 한국인 코치진


동남아시아 야구 보급이 불가능했다면 나 또한 존재할 수 없었다

야구 현장을 떠난지 10년이 되었고, 어느덧 야구인생은 50년이 넘었다. 내 삶은 야구 외에 떠올릴 수 있는 단어가 단 하나도 없다. 그러나 내가 걸어온 길과 선택에 단 한번도 후회하거나 다른 인생을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다.

나 자신을 뒤돌아보면 야구를 시작한 까까머리 중학교부터 환갑이 넘은 지금까지 야구인으로 살아온 내 야구인생에 대해 대중들은 성공한 삶이라고 판단하고, 사실 나 스스로도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이었다.

아마추어 시절과 프로야구 선수생활 동안 헐크라는 강렬한 이미지의 별명으로 불리며 그라운드에서 많은 박수를 받았다. 그리고 지도자 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날아가 마이너리그와 메이저리그 코치까지 하면서 새로운 야구를 접했다. 시카고 화이트삭스 시절 대망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경험했고 우승반지도 간직할 수 있었다. 한국 프로야구 감독을 경험하기도 했다.

이러한 야구인생에서 복에 넘치는 팬들 사랑을 받았고, 어디를 가더라도 사람들의 관심과 환대를 받는 유명인으로서 과분함도 누렸다.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이러한 나의 자만이 나이가 들어가고 세상을 보는 깊이와 성찰이 생기며 대중에게 받은 사랑과 관심에 대한 보답을 어떻게 해서라도 꼭 해야된다는 의무감이 온통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잘 하는 것이 야구다. 내가 잘 했고, 잘 할 수 있는 야구를 통해 성장하고 있는 후배들과 사회에 미력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아직도 야구 유니폼을 입으면 자신도 모르게 힘이 쏟아나고 몸이 막 즐거워진다.

야구를 하는 학생들에게 야구를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야구에 대한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열심히 재능기부를 하는 동안은 늘 나를 괴롭히던 어깨통증도 신기할 정도로 사라진다. 또 야구에 입문하는 어린 아이들이 야구공을 던지고 치고 달리고 하면서 해맑게 웃고 즐거워하는 모습들을 보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선택한 것에 스스로가 대견스럽기까지 느껴질 때도 있다.

이만수 감독과 라오스 소년선수

지난 10년 동안 대한민국 전국을 돌면서 거의 안 가본 도시가 없을 정도로 많은 곳으로 다니면서 재능기부를 했다. 주변에서 왜 사서 고생하냐는 걱정스런 시선과 핀잔도 듣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야구인들과 대중, 언론에서조차도 나의 이러한 행보에 어리둥절해 하며 의구심과 안쓰러움이 교차된 눈빛을 전하곤 했다.

이 무모한 도전은 10년째 현재진행형이다. 사실 이렇게까지 발품 팔아가며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심지어 외국을 다니며 야구 재능기부에 힘쓰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아직 기량이 부족하고 전문적인 코칭을 통해 발전 가능성이 있는 후배들에게 내가 야구를 하면서 체득한 기술들과 야구철학을 전수해주고 싶었다. 또 하나는 나의 이러한 행보를 직접 보고 경험한 후배선수가 야구선수 생활을 마치고 야구 현장을 떠났을 때 이 험한 길을 기꺼이 같이 동행하고 실천할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야구선수가 은퇴 이후 만들어갈 수 있는 최고의 일이 단지 지도자와 해설자라는 야구계의 불문율을 깨고 싶다. 자신들이 가진 재능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고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얼마나 보람된 일이며, 아름다운 삶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또 시간이 지날수록 그러한 뜻을 알아주는 이들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 고무적이기는 하다.

왜 하필 동남아시아인가?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한다. 나 또한 그들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넘친다. 야구에 부적합한 기후와 자본주의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야구가 경제 수준이 그리 높지 않은 동남아시아에서 활성화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이라고 많은 이들이 이야기한다. 경제력이 높고 더 좋은 환경을 가진 다른 대륙이 아닌 동남아시아에서 야구가 과연 잘 보급될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의문을 갖는다. 한때 나 또한 의문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에도 1904년 갓을 쓰고 뛰는 것이 마치 체면과 위신을 떨어뜨리는 행동으로 여겨지던 조선땅에서 YMCA를 통해 야구보급을 했던 필립 질레트 선교사 또한 지금의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100여년 전 필립 질레트 선교사가 야구보급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시도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동남아시아에서 야구 보급을 하고 있는 나 또한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재능 기부
사전적으로 말하면 재능 기부는 “자선 사업이나 공공사업을 돕기 위하여 개인의 재주와 능력을 대가 없이 내놓는 일”이다. 이 문장에서 내가 가장 가치있게 여기는 것은 “대가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야구를 하고 있는 후배들을 위해, 그리고 생전 야구를 접해보지 않은 동남아시아의 국민들을 위해 대가 없이 내가 가진 재주와 능력을 내놓는 일. 야구를 오랫동안 해온 선배로서 이 일을 먼저 실천하고 싶었다.

국내 재능기부를 넘어 동남아시아에 야구 전파를 생각했던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바랄 수 있는 대가가 없는 곳이며, 야구 저변이 가장 낮은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대륙과 비교해 한국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한국과 비슷한 문화와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야구가 보급되지 않은 이 불모지에 대한 내 도전정신의 발화가 가장 큰 이유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은 야구를 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한 세대뿐만 아니라 오랫 동안 야구를 통해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라오스와 베트남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인도차이나 반도 젊은이들에게 야구를 통해 희생, 배려, 협동, 인내 그리고 예의 및 희망을 전해주고 싶다. 나 또한 어린시절에 야구를 통해 먼 미래를 향한 꿈과 비전을 가졌던 기억이 난다.

인도차이나반도의 야구전파 프로젝트가 내 생애에 다 이루지 못한다 하더라도 후배들이 반드시 이 위대한 프로젝트를 완성시켜 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이 내가 위에서 이야기했던 재능기부를 시작한 이유 중 하나다.

청출어람
푸른 색이 쪽에서 나왔으나 쪽보다 더 푸르다는 뜻으로, 제자나 후배가 스승이나 선배보다 나은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야구인과 비야구인. 이런 구분이 딱히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 라오스와 베트남 그리고 캄보디아는 전문적인 야구인 출신이 아닌 야구 자체를 사랑하는 비야구인들이 야구전파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야구 보급이 계속 이어지고 나아가 훨씬 더 찬란한 업적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많은 후배들이 함께 이 일에 동참해주기를 바란다.

평생 야구를 업(業)으로 살아온 야구인이든, 야구의 매력에 빠져 그것을 나누고자 하는 비야구인이든 상관없이 인도차이나반도의 야구보급 프로젝트를 굳건하게 이어가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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