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룩스 주한 영국대사의 아주 특별한 강연
[아시아엔=홍인표 전 경향신문 논설위원, 부국장, 베이징특파원 역임] 콜린 크룩스 주한영국대사가 14일 오후 5시 서울 종로구 인사동 정신영기금회관에서 열린 관훈클럽 영시공부모임 공개강좌에서 199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아일랜드 시인 셰이머스 히니(Seamus Heaney·1939~2023)의 시 세계를 주제로 특강을 했다.
삼성언론재단 후원으로 열린 이날 강좌에는 회원 29명이 참석했다. 크룩스 대사(54)는 북아일랜드 출신으로 영국 캠브리지대학 피츠윌리엄칼리지를 졸업한 현대 언어학 석사로, 한국어를 비롯해 프랑스어, 중국어, 독일어, 인도네시아어에 능통하다.
크룩스 대사는 영어로 진행한 특강에서 “저는 히니 시인이 태어난 곳에서 30㎞ 떨어진 북아일랜드 농촌에서 태어났다”며 “히니 시인이 천주교 신자인 반면, 저는 신교 신자인 점이 다르다”고 말했다.
크룩스 대사는 이날 특강에서 히니 시 8편을 소개했다. 가장 먼저 소개한 시는 ‘공개편지'(Open Letter)로 1983년 히니 시인이 펭귄북 편집자가 현대영시선집 작가에 (아일랜드 출신인) 자신을 포함한 것을 비판하면서 쓴 글이다.
히니는 이 시에서 “내 여권이 (자주색 영국 여권이 아닌 아일랜드 여권 색깔인) 녹색이라는 걸 잘 생각해보라. 나는 한번도 (영국) 여왕을 위해 술잔을 들고 건배한 적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을 정도로 아일랜드 정체성을 지키는 데 앞장섰다.
크룩스 대사는 “아일랜드는 영국과 다른 정체성을 갖고 있다”며 “이것은 다양성의 원천이면서 동시에 갈등의 원천이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히니를 “아일랜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며 “히니 시인은 1939년 북아일랜드 농촌에서 형제 9명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고 했다. 크룩스 대사는 히니의 작품 중에서 가족과 관련된 시를 주로 소개했다.
크룩스 대사는 시인이 장학금을 받고 기숙학교에 다니던 14세 때,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4살배기 동생의 장례식 참석을 위해 학교에서 조퇴한 상황을 그린 ‘조퇴'(Mid-Term Break), 1984년 73세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기리며, 어머니와 함께 말없이 감자를 깎았던 생전 추억을 담은 ‘정리'(clearance)를 소개했다.
그는 이와 함께 대대로 농사를 위해 삽 들고 땅을 열심히 파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대한 어린 시절 기억을 묘사한 ‘땅파기'(Digging), 말을 끌고 밭고랑을 정확하게 솜씨 좋게 갈던 아버지를 추억하면서 자신은 아버지만큼 기술이 없음을 드러낸 ‘추종자'(Follower)를 설명했다.
크룩스 대사는 “북아일랜드는 원래 농사 짓는 가족 중심의 사회였다”며 “’땅파기’에서 보여주듯이 농부인 아버지는 감자를 심었지만, 히니는 총 대신 펜을 들고 글을 썼다”고 말했다.
이밖에 크룩스 대사는 “집을 고칠 때 건물 밖에 가로세로로 엮어 건물을 지탱하는 구조물을 한국말(비계)로 뭐라고 하느냐”고 묻고는 “이 시는 아내에게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크룩스 대사는 ”시인은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며 ”아일랜드 사람들은 공동체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크룩스 대사는 ”’두 대의 무개차량'(Two Lorries)을 통해 히니 시인은 북아일랜드 역사를 두 대의 트럭에 비유했다“며 ”하나의 트럭은 고향 사투리를 쓰며 친근하게 어머니에게 다가온 석탄 배달부가 온기와 평화를 가져다주는 석탄 운반 차량, 다른 하나의 트럭은 북아일랜드 독립을 주장하면서 버스 정류장을 폭발시킨 폭발물 차량“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마지막 8번째로 관용과 희망을 노래한 희곡 ‘트로이에서 치유'(The Cure at Troy)에 나오는 시를 소개했다. 이 작품은 활의 명수이며 트로이전쟁 영웅인 필록테테스의 기구한 운명을 다룬 그리스 소포클레스 7대 비극 중 하나인 <필록테테스>를 히니 시인이 희곡으로 만들어 무대에 올린 것으로, “생애에 한번은 열망하던 정의의 큰 물결이 밀려올 것이며, 희망과 역사가 일치하리라”고 부르짖고 있다.
‘트로이에서 치유’는 아일랜드계인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애송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선거 당시 이 시를 인용했고, 2013년 부통령 시절 한국을 찾았을 때 연설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크룩스 대사는 1992년 영국 외교부에 들어가 주미대사관 1등 서기관, 주중대사관 참사관을 거쳐 북한 대사를 2018년부터 2021년까지 3년 동안 지낸 뒤 지난해 한국대사로 부임했다.
1999년 주한대사관 1등 서기관으로 있을 때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방한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바 있다. 그는 한국과 북한의 차이점을 묻는 회원 질문에는 “서울은 활기차고 평양은 조용하다”고 대답했다.
크룩스 대사는 “평양에는 27개국 외국 대사관이 있었지만 지금은 8개국으로 줄었다”면서 “평양과 원산, 남포, 묘향산에는 출입이 자유로왔고 그 이외 지방에 가려면 별도 허가를 받아야 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