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음악] ‘봄여름가을겨울’ 이설야

봄여름가을겨을/다시 겨울/겨울은 손목이 가는 눈발

봄여름가을겨을
다시 겨울
겨울은 손목이 가는 눈발

지난 겨울은 잘 있습니다
그때 내린 눈은 아직 다 녹지 못한 채
올해는 올해의 눈이 내립니다

우리는 흩뿌려진 눈처럼
몇년째 만나지 못했습니다
역병은 거리의 불빛을 모두 잠재우고
햇빛도 모두 먹어치웠습니다

눈송이들은 눈송이들과 함께 흩어지면서
하염없이 내립니다
내리는 눈이 하나로 뭉쳐진다면
땅은 커다란 눈사람
하늘은 거대한 빙하
나는 보이지 않는 눈송이

밤 속에서 밤이
밤을 다시 얼리고 갑니다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겨울
겨울은 봄을 만듭니다
봄은 나비를 만들고
나비는 숲을 부드럽게 만듭니다

일년 내내 슬픔은 슬픔을 말하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오늘은 오늘의 마음을 다 쓰겠습니다

– 이설야(1968~) 시집, ‘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 창비, 2022

브람스 랍소디 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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