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산 김일훈#21] 죽염으로 만든 ‘사리장’으로 늑막염 고쳐
그러던 어느 날 김면섭의 집에 육신이 다 곪아 문드러진 환자가 구루마에 실려 들어왔다. 늙은 어머니가 하나뿐인 아들을 살려보고자 묻고 물어 아들을 이불로 싸서 구루마에 앉혀 김면섭의 집을 찾아온 것이었다. 폐의 진기가 고갈되어 늑막염이 오래된 환자로 눈까지 곪아 눈은 진물이 흘러 제대로 보지도 못하는 환자였다.
사람들이 살 썩는 냄새에 질겁을 하고 피하며 김면섭 역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내종병이 너무 깊어졌소” 하며 이미 너무 늦어 안되겠다는 표시를 했다. 이 때 운룡이 환자를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안채로 들어가 할머니를 찾았다.
“할머니 저번에 죽염으로 만든 약간장이 있지요?”
손자가 시켜서 약콩을 삶아 콩알째로 특이한 방법으로 메주를 쑤고 오리를 삶고 약초를 넣어 죽염으로 간장을 만들어 따로 보관해둔 간장독이 하나 있기는 있었다. 운룡이 하는 일은 무엇이든 들어주라는 김면섭의 엄명이 있었기에 할머니는 도대체 무슨 짓인지 모르지만 시키는대로 일꾼을 데리고 간장을 만들어 두기는 하였다.
생떼같은 귀한 돈을 펑펑 써서 죽염을 만들고 약콩으로 이상한 간장을 만들기는 했지만 특별히 다른 간장과 다르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귀한 돈을 낭비한 건 아닌가 하는 정도였다.
운룡은 그렇게 돈을 많이 들여 힘들게 만든 약간장을 퍼서 환자에게 주라고 하였다. 조금씩 떠 먹고 눈에도 자꾸 찍어 바르고 진물이 흐르는 부분에도 바르라고 했다. 그리고 몇 가지 처방을 일러 주었다. 집오리의 창자와 내장을 다 넣고 금은화, 포공영, 건칠피를 넣고 지네를 생강으로 훈제해서 넣고 푹 삶아서 죽자사자 퍼마시라고 하였다.
“할머니, 아드님은 이제 살 수 있으니 걱정마세요.”
환자의 어머니인 노파는 운룡을 관음불을 대하듯 눈물을 줄줄 흘리며 감사했다. 모두가 무서워 피하는 자신의 자식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보통 사람 대하듯 하며 척척 처방을 일러주는 아이가 신으로 보일 뿐이었다. 다 죽을 것 같던 아들이 정말 살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운룡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환자는 이미 살아난 느낌이었다. 그 자리에 둘러 선 사람들은 운룡의 몸에서 후광이 비치는 것 같다고 느꼈다.
운룡이 약간장으로 내종병을 고친 사례였다. 이후 이 약간장은 피를 극도로 맑게 하기 때문에 오래 먹으면 뼈에 부처님처럼 오색영롱한 사리가 만들어진다 하여 사리장이라 불리운다.
어느 하루 김면섭의 사랑방에서 여러 어른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 노인이 대단히 훌륭한 서양 의학을 바탕으로 서양의 선교사들이 평양에 세운 병원에서는 “못 고치는 병이 없다”며 떠벌리는 소리를 듣고 운룡은 참지 못하고 한마디를 내뱉었다.
“할아버지는 무지몽매한 서양 사람들이 무슨 신기라도 부리는 듯이 말씀하시지만, 그건 모르시는 말씀이에요. 사람의 병은 그렇게 해서 고치는 게 아니에요. 서양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눈앞에 보이는 찢어진 것만 자르고 꿰메고 하는 것 뿐인데 다시 그 병독이 다른데로 깊숙이 옮겨가는 건 생각지도 못하는 천치들인데 다시는 어디에 가서 그런 무식한 말씀을 하지 마세요.”
“저, 저런 고얀 놈을 보았나! 네 이놈, 대강지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른에게 그 무슨 말버릇이냐?”
운룡에게 무안을 당한 방문객은 노발대발했으나, 운룡의 조부가 나서서 백배사죄하고서야 사태를 겨우 진정시킬 수가 있었다.
그 날 저녁 김면섭은 운룡에게 물었다.
“운룡아, 할아비는 너에게 궁금한 게 있구나. 너는 서양 의서나 의학이라는 걸 한 번도 접해 본 적이 없지를 않느냐? 그러면서 어떻게 서양 의학을 그토록 업신여기고 못마땅하게 생각하는지 할아비는 알 수가 없구나. 너에게 그럴 만한 무슨 까닭이라도 있느냐?”
김면섭은 다른 아이도 아니고 바로 손자 운룡이 서양 의학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여러 차례 들었기 때문에 그 연유를 물었던 것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잖아요? 이 세상에 이미 사람들을 모든 질병에서 구해 줄 사람, 세상이 생긴 이후 처음으로 나타난 사람,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의학을 창시할 사람을 바로 곁에 두고서도 그 사람이 누구인 줄 모르고 그까짓 한심한 서양 의학을 칭송하느라 입에 침이 마르지 않으니 참으로 답답한 일이지요. 서양 의학에서는 사람의 병을 고친다고 배를 가르고 오장육부의 이것저것을 떼어내고 잘라내고 한다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의학입니까? 사람의 몸은 우주의 본체에 감응하여 이루어졌고, 또 살아 있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우주의 기를 받으며 생기를 보존하는 전류체입니다. 그런데 뱃속을 열어 그 장기를 훼손한다면 전류 합선이 일어나고 내부 장기는 외부 공기독에 노출되어 그 사람의 몸은 더 이상 우주의 기를 받을 수 없게 될 것이고, 그런 것은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의학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못된 기술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저는 서양 의학이라는 것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김면섭은 운룡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그 아이가 보통 아이가 아님을 알았고, 젖을 떼면서부터 보여 온 여러 가지 행적으로 ‘과연 영특하기 이를 데 없는 아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가져왔었다. 하지만 비범함과 영특함을 뛰어넘어 이토록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하리라고는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운룡아, 너는 지금 네 자신이 이 세상에 새로운 의학을 창시하여 알릴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냐?”
“네, 할아버지. 저는 지금까지 있었던 의학을 완전히 뒤바꾸는 새로운 의학의 기틀을 만들어 그것을 세상에 전파함으로써, 인류가 존속하는 한 영구히 유용한 살아 있는 의학을 완성시킬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여러 가지 의서를 읽으시고 아픈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 애써 오신 할아버지께는 지극히 송구스런 말씀이지만, 할아버지께서 《본초강목》·《의학입문》·《경악전서》·《동의보감》 같은 의서들을 읽으신 결과로 사람들의 질병을 모두 고칠 수 있다고 하실 수 있나요? 지금껏 해오셨으니 잘 아실 것 아니에요. 후한 시대의 질병과 지금의 질병이 같을 수 없듯이, 질병은 시대에 따라 더욱 다양해지고 또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의원들은 옛날의 의서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을 뿐이며, 맞지도 않는 의학 지식을 헛되이 읊조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서 무슨 병을 고치겠습니까? 저는 앞으로 쓸데없는 수북한 의서들을 싹 집어치우고 새 의서 하나로 세상을 구할거예요.”
점입가경이라더니, 운룡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김면섭은 할 말을 잃었다. 문득 두려움마저 느꼈다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었다. 수천 년 동안 전해져 오는 각종 의서들을 한낱 허튼소리 정도로 치부해 버리는 어린 손자를 미쳤다고 할 수도 없었고, ‘그래 네가 옳다.’고 할 수도 없었다.
“운룡아, 그렇다면 네가 창시하겠다는 새로운 의학의 근간은 무엇이냐? 아무리 그동안의 의학이 헛된 것이라 하더라도 무작정 매도해 버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중에는 취할 점도 많지 않겠느냐?”
김면섭은 대화 상대자가 어린 손자라는 사실을 이미 잊고 있는 듯했다. 어린 손자의 입에서 자못 심오한 의학적 담론이 전개되고 있음을 느낀 그는 응수를 하듯 그렇게 물었다. 운룡은 모처럼 할아버지와 대화다운 대화를 하게 되어 신바람이 난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감춰두었던 생각의 한끝을 펼쳐 보였다.
“의학의 근간은 우주의 원리에 충실한 자연의 회복에 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인간은 우주와 교감하며 살게 되어 있는 존재로서 지극히 ‘자연적’인 존재예요. 따라서 제가 생각하는 의학의 근간은 우주의 원리에 충실한 자연의 회복에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듣기로는 지금 서양에는 과학이라는 이름하에 각종 기계와 새로운 문물이 봇물 터진 듯이 생겨나고 있다는데, 이는 필시 자연적인 인간의 신체에 유해한 환경을 만들어낼 거예요. 편리함을 도모하고자 제 생명 갉아먹는 줄 모르는 어리석은 행위나 마찬가지이지요. 또한 서방금기의 살기에 의해 화생한 서양인들은 그 과학이라는 분야를 통해 수많은 살상이 일어날 거예요. 이미 우리나라에도 그 발길이 미치고 있지만, 지금 현재 우리가 나라를 잃고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 또한 그 서방의 살상무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그들은 사람을 죽이는 기상천외한 무기들을 많이 만들어낼 거예요. 우주와 자연의 원리를 가장 노골적으로 파괴하는 그런 무기들 말이에요. 지금까지 수천년 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지구속 독성 물질들을 캐내어 온 세상을 독으로 오염시킬거예요. 그게 바로 서양의 석유화학 문명이지요. 지구는 색소층, 그 위에 영소층, 그리고 제일 바깥쪽은 독소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과학의 발달이라는 미명하에 지하의 독성물질을 자꾸 캐내게 되면 공간의 독성과 지중의 독성이 서로 상합하여 지상 위의 모든 생명체에 괴질을 일으킬 것입니다. 앞으로는 듣도보도 못한 이상한 병이 생겨나고 자다가도 죽고 걷다가도 죽는 사람이 많아질 겁니다. 하지만 어떠한 질병이 생긴다 해도 제가 마련할 새로운 의학에 기초하면 못 고칠 게 없어요. 앞으로 오래지 않아 서양인들에 의해 개발된 살인 무기와 각종 화공약의 독성으로 인류가 전멸을 당할 위기의 때가 오게 되는데, 고금동서를 통틀어 그 사태에 대비하여 인류의 생명을 구할 방책을 밝혀놓은 의서가 어디 있었나요? 그렇게 될 것조차 모르고 있는 판인데. 하지만 제게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구제하고도 남을 무궁무진한 약물이 있어요. 우리가 숨 쉬는 이 공기 중에도, 식물이 자라고 동물들이 사는 모든 땅 위에도, 드넓은 바다 속에도, 인간의 체내에서 독성을 해독하고 고갈되는 색소를 회복시켜 생명을 되찾게 해줄 약물들이 존재한단 말이에요.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고 다만 감추어져 있을 뿐이니, 그것을 일러 ‘신약’이라 이름 해도 무방하겠지요. 인간이 상상도 할 수 없는 곳에 무진장으로 감추어진 신비한 약물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그것을 어떻게 이용하면 좋은지, 그 완전무결한 방법을 전할 사람이 바로 저예요, 할아버지.”
김면섭은 놀라움으로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열 살도 채 안 된 어린아이의 입에서 그와 같은 얘기를 듣게 될 줄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김면섭은 잠시 혼란스러워진 생각을 가다듬느라 눈을 지그시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