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독일 비밀경찰 활동무대와 수법
[아시아엔=김중겸 전 경찰청 수사국장] 빌헬름 슈타이버(Wilhelm Steiber)는 법률가다. 무미건조한 법률보다 경찰 일이 구미 당겼다. 베를린경찰에 들어갔다.
1841년 수사과(Division Ⅳ) 경감(Inspector)에서 1848년 경찰서장(Chief of Police)으로 승진했다. 비스마르크의 심복으로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도 그가 수집한 정보가 승리에 기여한다.
1850년 추운 겨울날 왕이 불러 명령했다. “런던으로 도망간 칼 마르크스(Karl Marx) 정보를 입수하라!”
마르크스는 1848년 2월 21일 <공산당선언>을 출간했다. 범위가 넓고 애매한 사회를 기반으로 한 사회주의Socialism가 아니었다. 친근한 공동체community에 바탕을 둔 새로운 세상 공산주의(Communism)를 주장했다.
계급투쟁이야말로 사회변혁의 원동력이라고 외쳤다. 1848년 2월 22일 프랑스, 3월엔 베를린과 빈 혁명 촉발했다. 헝가리, 폴란드, 이탈리아로 계속 번져 나갔다.
왕명은 지엄한 법. 빌헬름 슈타이버는 항구마다 포진한 방첩요원의 촉수 피해 입국해 런던에 잠입했다. 마르크스 집 주변의 삼엄한 경비망 뚫고 몰래 들어갔다.
그는 공산주의연맹(Marx’s Communist League) 명단을 입수해 독일 각국 경찰에 보내 체포를 독려했다. 파리경찰청의 친구에게도 1부를 선물하며 공조체제 굳혔다.
Karl Hinckeldey는 1848년 11월 16일 베를린경찰서장에 임명됐다. 대선배 Steiber의 활약에 고무되어 정보교환소를 생각해냈다.
교환? 증권? 정보?
독일어 사용하는 국가의 비밀경찰과 일일이 상의했다. “정보거래소를 만들자!”고 했다. 정보 빈곤으로 골치 아프던 터라 동조자 많았다. 1851년 4월 9일 드레스덴에 chief들이 모였다. 창립회의다.
프로이센의 비밀경찰을 중심으로 Police Union of States를 창설했다. Union이면 경찰관 노동조합이라고? 그게 아니라 비공식 정보협력기구다.
여기에 베를린, 비엔나, 바데, 뷰르템버그, 하노버, 색소니, 드레스덴, 바바리아가 참여했다.
이들의 업무는 1848년 혁명 관련자와 위험한 사상 소지자에 대한 정보 분석과 교환 그리고 민심동향 체크였다.
이들은 주간 정보지를 발간, 배포했다. 아울러 얼굴 맞대고 이면정보까지 나누는 정례회의를 1년에 3회까지 열었다.
실적이 올라가자 독일 이외의 나라, 벨기에, 덴마크가 참여했다. 아일랜드 독립운동가를 잡아야 했던 영국도 자료를 주고 받았다.
Hinckeldey는 왕으로부터 공로 인정받았다. 승승장구하며 경찰청장이 됐다.
국왕이 그에게 말했다. “나한테만 보고해! 대단한 특권이다.” 그는 경찰장관이나 마찬가지였다. 내무부장관으로부터도 독립해 경찰을 지휘했다. 오직 왕에게만 충성했다.
정보망은 어떻게 운용했나? 상선의 선장과 선원을 스파이로 활용했다. 대사와 영사는 주재국에 도망 온 혁명분자의 독일과 오스트리아로의 추방교섭을 담당케 했다. 파리, 런던, 아테네, 터키, 뉴욕에 에이전트를 배치하여 동향 감시했다.
에이전트 배치지역은 각각 특색이 있었다. 파리는 지적 분위기가 혁명가를 받아들였다. 마르크스와 같이 본국 프로이센에서 좀 쫒아내라고 요청하지 않는 한 체류 눈감아 줬다.
런던의 경우 33km 거리의 영국해협은 범법자 밀항이 손쉬웠다. 말썽부리지 않으면 동향감시에 그쳤다.
아테네는 위험 닥치면 섬으로 도망가 숨기 좋았다. 터키는 고학력 정치범 우대해 공무원으로 채용했다.
미국은 출입국관리가 느슨해 불법이민이 쉬웠다. 관헌들은 대륙 일에는 무관심하고 정보기관도 존재하지 않았다.
1866년, 정보교환기구의 맹주격인 독일=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전쟁에 돌입했다. 가입국 간의 이익이 상충됐다. 해체 수순을 밟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