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아’ JP 운정雲庭 김종필을 다시 생각한다

김대중(DJ)과 김종필(JP)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극적으로 손을 잡아 DJP 공동정부를 세우게 된다. 합창하는 두 사람.

지난 23일은 김종필 타계 3주기가 되는 날이다. 3김 중 김영삼, 김대중의 시대는 있었으나 김종필의 시대는 오지 않았다. 한국 현대사에서 그만큼 많은 일, 큰 역할을 한 정치인은 별로 없을 것이다. 박정희가 없는 김종필은 생각할 수 없으나, 김종필을 제외하고서 박정희의 功과 過를 논할 수도 없다.

5.16 군사혁명은 국민의 조용한 지지를 받았다. 윤보선 대통령의 “올 것이 왔군”이라는 탄식은 이를 대변한다. 김종필은 5.16을 설계하였으며, 혁명정권 수립과정에서 악역을 맡았다. 혁명공약은 이수정의 ‘4.19 선언문’에 비길만한 명문이다.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는 일성에 미국은 일단 우려를 접었다. 절망과 기아선상에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한다는 공약에 국민은 기대를 걸었다.

김종필은 분요함 속에서 여유를 찾으려 애썼고 멋을 알았다.

김종필은 혁명정부의 악역을 맡았다. 장도영에 개인적으로 은혜를 입어 주저하는 박정희에게 보고하지 않고 장도영을 제거했다(7.2 先斬後報). 장도영은 생전 “박정희와 김종필에 여한은 없다”고 하였다. 김종필은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정권을 옹위하고 새 정치를 구현하고자 공화당을 창당했다.

경제건설을 위해 불가피한 한일회담을 타결했다. 과거사 문제, 독도 문제, 청구권을 일괄 포함해, 김-오히라 메모로 정리했으나, 학생들의 격렬한 반대에 밀려 ‘自意半 他意半’으로 세상을 주유하였다, 포항제철소는 청구권 자금과 박태준의 일관된 건설의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김종필의 만지동근(萬枝同根). 천 갈래 만 갈래 나뉘어진 우리 사회에 던지는 그의 메시지다. 

JP의 시대는 오지 않았다. 내각제에 대한 그의 소신은 화두話頭를 던진다. YS, DJ와 내각제를 연대로 합쳤다가 이용만 당하고 말았지만, 한사람에게 모든 것을 의탁依託하는 대통령제보다 여럿이 ‘나누고 합치는’ 내각제가 민주적이라는 생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당권黨權이 전권全權을 의미하고, 당론黨論이 의원議員 개개인을 압도하는 한국 정당 수준으로 앞으로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JP의 국회답변은 완벽했다. DJP의 한계 내에서 국정의 모든 문제에 주저치 않고 답했다. 대처 수상의 의회 연설을 연상케 했다. 김종필은 하지만 국체를 어지럽히는 짓은 용납容納하지 못했다. 그는 정치를 하였으나, 기본적으로 국체를 흔드는 것을 보지 못하는 사관학교 출신 군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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