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한겨레’ 임석규 편집국장 입장문 “공정보도 위한 후속조처 책임 있게 추진”

1988년 5월 14일 오후 한겨레신문 창간호를 펼쳐 읽고 있는 송건호 초대 사장(오른쪽에서 두번째). 송 사장은 1975년 동아일보 광고사태 당시 편집국장으로 유신 독재정권에 맞서다 해직돼 한겨레 창간에 앞장섰다. 옆에 당시 평민당 총재, 이돈명 변호사 등의 모습이 보인다.

후배들이 왜 이런 성명을 냈을까, 여러모로 깊이 생각해봤습니다. 손가락이 아닌 달을 보려 했습니다. 좋은 신문 만들고 제대로 된 저널리즘을 구현해야 한다는 열망 이외에 다른 뜻은 찾기 어려웠습니다. 성역을 두지 않고 권력과 자본을 비판해온 한겨레 기자로서 자긍심을 훼손당하지 않으려는 비명 같은 외침이라고 믿습니다. 그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서 출발하고자 합니다.

편집국장 맡은 지 10개월이 지났습니다. 돌이켜보면 후회되는 일들도 많습니다. 판단을 잘못한 일도 있고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머뭇거리다가 때를 놓치고, 더 달라붙어야 할 때 물러서기도 했습니다. 공정하지 못한 보도도 더러 있었다고 인정합니다. 다만, 특정 정당, 정치세력을 이롭게 하려는 목적으로 기사를 다루지 않았다는 점만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보지 못한 부분은 있을지언정 보지 않으려 일부러 눈을 감지는 않았습니다.

성명에는 법조 보도에 대한 여러 사례가 나옵니다. 사내 구성원 중엔 거론된 내용에 견해를 달리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성명에서 거론된 사례나 세부 내용을 두고 논박을 이어가다 보면 본질을 놓칠 우려가 있습니다. 젊은 현장 기자들의 문제의식이 성명에 거론된 사례에 국한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거론된 사례 외에 그동안 한겨레가 다뤄왔던 다양한 사안에 대한 여러 문제의식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를 포함해 국장단 전체가 지금의 상황을 뼈아프게 되돌아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구체적 내용과 경위에 대해선 차후 대면 또는 비대면 방식의 간담회 등을 통해 깊이 있게 의견을 교환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대화 방식은 구성원들의 의견을 모아 여러 형태를 두루 검토하겠습니다. 대화를 통해 성명에 거론된 사례 외에 지난 보도들과 편집국 의사 결정 과정에 관해서도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한겨레 내부의 이견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최근에 더욱 두드러진 게 사실입니다. 특히 법조 보도를 둘러싼 생각의 편차가 갈등으로 표출되는 경우가 잦습니다. 법조 보도의 이면엔 복잡한 정치·사회적 논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현대사의 특수한 맥락 속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관점의 차이도 있고 강조하는 포인트에 따라 이견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럴수록 팩트에 충실해야 한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난해 유독 법조 관련 이슈들이 많았습니다. 민감한 사안들이었으니 현장 목소리에 귀 기울여 팩트가 뭔지 더욱 엄밀하게 점검하고 꼼꼼하게 짚어봐야 했으나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개선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이를 놓친 점이 뼈아프게 다가옵니다. 콘텐츠의 오류를 발견했을 때 좀 더 과감하게 시정하고 사과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오늘 아침에 사회부장과 법조팀장이 보직사퇴 의사를 밝혀왔습니다. 두 사람만의 책임도 아니고, 두 사람이 책임지는 것으로 끝나는 문제도 아닙니다. 하지만 고심 끝에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대신 콘텐츠를 최종 책임지는 편집국장으로서 현장 기자들의 성명을 무겁게 받아들이며, 공정 보도를 위한 후속 조처를 책임 있게 추진해나가겠습니다. 성명에서 요구한 대로 다양한 형태로 토론단위를 확대하고 보도를 점검하는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현장 기자들과의 소통 방안도 두루 의견을 모아 더욱 구체화하겠습니다. 현장 기자들의 목소리를 콘텐츠에 충실히 반영할 수 있는 제도와 기구, 조직 등도 조속히 마련하려 합니다.

권력과 자본에 대한 성역없는 보도야말로 지난해 1만호를 넘어선 한겨레가 미래를 향해 쭉 뻗어 나갈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성명이 인용한 대로 “특정 정당이나 정치세력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을 것”이란 창간사를 거듭 새겨봅니다. 편집국장으로서 성역없는 보도에 대한 시그널이 다소 부족하지 않았는지 되돌아보겠습니다. 이번 성명이 한겨레가 추구해야 할 좋은 저널리즘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산적 논쟁과 치열한 토론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안팎의 여러 사정 탓에 여기에 담지 못하는 얘기들도 있습니다. 앞으로 여러 자리를 통해 대화하고 토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1년 1월 28일 임석규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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