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는 피를 부르고”…야만적 처형과 처절한 복수

단두대

1649년 1월 잉글랜드 왕 찰스 1세는 왕으로서 왕과 왕국에 모반하는 자를 처형하는 경우와는 정반대 상황에 처했다.

왕이 모반자들에 의해서 반역죄로 재판정에 서는 일 당했다. 참수형.

1월 4일 급하게 만든 나무처형대에 목 올렸다. 망나니에게 용서한다는 말 남겼다. 그 때문인가. “신하들에게 배반당하는 고통 겪으셨는데, 아픔 보태지 않겠습니다.” 단 한번의 도끼질에 목 잘렸다.

사형집행 영장에 서명한 자는 올리버 크롬웰을 포함한 59명이다. 국왕살해자라는 칭호 선사받았다.

1660년 독재자 크롬웰 사망하자 분위기 싹 변했다. 처형당한 찰스 1세의 아들, 정통성 있는 왕위계승권자다. 왕에 앉히자 했다.

의회지도자들은 네덜란드에 있는 그에게 귀국해 도와주시길 요청했다. 5월 29일 런던에 입성, 왕위 올랐다. 30세때다. 11년 부평초 생활에 종지부.

아버지처럼 죽임 당하지 않고, 고국 떠나 방랑하지 않으려면? 여하한 정치적 혼란에도 왕권 지키는 일이었다.

우선적으로 처리할 과제는 영장서명자 즉 국왕살해자 31명이 살아있었다. 내편으로 완전 귀순한 19명은 살려줬다. 뻣뻣한 12명은 참수했다.

죽은 자들 가운데 주모자 올리버 크롬웰과 다른 두 명의 시체 파냈다. 교수형으로 매달아 놨다. “국왕 시해한 자에 대한 벌이다. 잘 봐두라”는 엄포였다.

잘 먹었다고 전해진다

취미라면 자물쇠 만들기와 사냥, 정치에는 무관심했다. 혁명 진행 중인 때의 일기장엔 ‘아무 일 없음’이라고 쓰여 있었다. 정치에 관한 한 무능했다는 평을 받았다.

1789년 프랑스혁명 발발 후 4년 지났다. 1월 21일 아침식사는 송아지 커틀릿 여섯 쪽, 소스 묻힌 닭 반 마리, 빵, 샐러드와 과일을 먹었다.

흰 포도주 2잔, 칼리칸토 포도주 한 잔을 곁들였다. 빵은 소스 묻혀 다 먹었다. 접시 깨끗하게 다 비웠다. 사형장으로 출발했다.

단두대 앞에 섰다. “나는 죄 없이 죽는다……..” 했다. 함성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단두대에 목 올려놓았다. 칼날 녹 쓸었나. 첫 번째 목 붙어 있었다. 루이 16세는 고통에 절규했다. 두 번 더 칼날 내려갔다. 군중들은 노래하고 춤췄다.

조르주 당통은 이를 보고 “전 유럽(왕국)에 도전, 군주의 목 떨어뜨렸다”고 선언했다. 얼마 후 그 자신의 목도 단두대 밑 바구니에 떨어졌다.

또 시간 흘렀다. 수많은 동지와 적 죽인, 혁명의 스타 로베스피에르도 그가 다른 사람에게 했던 절차 그대로 밟아 단두대에 목 올려놨다.

한밤중에 라이플+피스톨+나이프로 학살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 후 임시정부. 차르 니콜라이 2세 일가 목숨을 보전하려고 했다. 시골로 보내 은신케 했다. 레닌이 정권 잡자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

1918년 혁명 반대하는 백군白軍 활동 활발해졌다. 볼셰비키는 “황제가 백군 손에 들어가면 정통성 생긴다. 사기 고양된다. 우리에게 불리하다. 저지해야 한다”고 했다

7월 17일 레닌은 황제일가 감금하고 있는 적군赤軍에게 전보로 명령 내렸다. 00시30분 총살형 집행부대가 들이 닥쳤다. 깨웠다. 사진 찍는다며 지하실로 데려갔다.

1차 소총으로 쏴 죽였다. 그래도 불안한지, 2차 대검으로 마구 찔러댔다. 3차엔 권총으로 확인 사살. 신원확인 못하게 하려고 시체 절단, 광산에 던져 놨다. 다시 와서 구덩이에 넣어 감췄다.

차르 50세, 황후 46세, 올가 공주 22세, 타티야나 공주 21세, 마리야 공주 19세, 아나스타시아 공주 17세, 알렉세이 왕자 13세였다.

의심받을까 두려워서

1991년 광산 근처 구덩이에서 차르, 황후, 세 공주 유해 찾았다. 1998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성당에 매장했다.

2007년 죽임당한 곳에서 공주 마리야, 왕자 알렉세이 유골 찾았다. 총살장소에는 러시아정교회 대성당 세워졌다. 성소聖所다.

영국 왕 조지 5세와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2세와는 이종 사촌 간이었다. 양쪽 독일인 피 흘렀다. 혈육의 정으로는 니콜라이에게 구원의 손길 내밀어야 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이었다. 독일은 적국이었다. 영국인들이 독일계 좋게 볼 리 없었다. 도울 여건 되지 못했다. 몰살당하게 방치했다.

레닌도 독일첩자 소문에 시달렸다. 스위스에서 독일이 제공한 기차 타고 10년 만에 조국 땅 밟았기 때문이다. 정치자금 받았다는 말도 들었다. 차르 살려뒀다가 구설수 휘말린다. 아예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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