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3일] 몽골-이란-독일 대통령 바뀐 날
2009 노무현 전 대통령 봉화산서 투신해 서거
2009년 5월23일 새벽 노무현(盧武鉉, 1946년9월1일 출생) 전 대통령이 김해 사저 뒤 봉화산에서 투신해 오전 9시30분께 서거했다. 오전 5시45분께 사저에서 나와 봉화산에서 등산을 하던 중 오전 6시40분께 바위로 뛰어내린 자살이었다. 유서를 남겼기 때문이다.
8시13분께 병원에 도착했으나 상태가 위중해 9시30분께 서거했다. 사고 직후 사저에서 가까운 김해시 세영병원으로 먼저 옮겨졌으나 이미 의식불명 상태였으며 의료진은 심폐소생술을 시도하다 양산 부산대병원으로 이송했다. 병원도착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의식이 없고 머리를 심하게 다쳐 외상이 심한 상태였다.
병원측은 “23일 오전 8시23분께 인공호흡을 하며 응급실로 이송됐으나 도착 당시 의식이 없었고 자가호흡도 없었다. 두정부에 11㎝ 정도의 열상이 발견됐으며 심폐소생술을 실시했지만 회복이 안돼 오전 8시30분 중단했다”고 밝혔다. 뇌좌상이 확인됐는데 두부 손상이 직접 사인으로 확인됐다. 늑골 골절, 골반 등 전신에 다발성 골절이 확인됐다.
다음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서 전문.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2005년 몽골 새 대통령에 엥흐바야르 전 총리 선출
2005년 5월23일 몽골 신임 대통령으로 몽골 야당 인민혁명당(MPRP) 당수 남바린 엥흐바야르가 선출됐다. 47세의 젊은 나이였지만, 노련한 정치인이었다.
몽골 인민혁명당에 입당(1985년, 27세)하면서 정계에 입문, 34세에 의원(1992년)으로 선출됐다. 그해부터 5년동안 몽골 문화부 장관(1996년)을 지냈고 2000년 7월26일 총리에 취임해 4년 간 재임한 뒤 2004년 국회의장이 됐다.
1980년 모스크바문학대학을 졸업하고 영국 리즈대학에서 공부했다. 문학도 출신인 그는 1980~1990년대 몽골작가연합에서 사무총장, 부회장을 지냈다. 번역가로서 몽골의 고전 서사시들을 소개하고 찰스 디킨스 등 서양작가들의 작품들도 자국어로 번역했다.?
1997년 모하메드 하타미, 이란 대통령 당선
1997년 5월23일 치러진 이란 대통령 선거에서 모하메드 하타미(Mohammad Khatami)가 당선됐다. 승리가 예상되던 강경파 알리 아크바르 나테크 누리 국회의장을 누르고 제 5대 이란 대통령에 당선된 하타미는 이란 중부 아르다칸 출신으로 영어와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제 4대 라프산자니 대통령 시절 고문 겸 국립도서관장을 지냈다. 지난 1980년 카이한 언론그룹의 대표도 지냈다. 1982년부터 10년간 문화부장관을 지낼 당시에 이란 최초로 여가수의 야외공연을 허용했다. 당연히 젊은이와 여성의 폭넓은 지지가 뒤따랐다.
1994년 로만 헤르초크 독일 대통령에 당선
1994년 5월23일 실시된 연방회의 투표에서 집권 기민당의 로만 헤르초크 후보가 제7대 독일연방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당선자는 보수적 바탕 위에 풍부한 자유주의적 성향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인물로, 바이츠제커 독일 대통령의 뒤를 이었다.
1934년 4월 바이에른주에서 공장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뮌헨대에서 법률(국제법)을 전공, 30세에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으며 32세부터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7년 동안 법학 교수를 지냈다. 1973년 콜 총리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 남부의 바덴 뷔르템베르크주 문화부 장관(1978년)을 거쳐 내무 장관(1980년)을 역임했다.
헌법재판소 판사와 부소장을 거쳐 1987년부터 1994년까지 7년여 동안 헌법재판소장을 역임했다.
1976년 필리핀, 피랍 여객기 승객 구출
1976년 5월23일 필리핀 특수부대원들이 회교극단주의자들에 의해 납치된 여객기에 진입, 구출작전을 폈다. 납치범 3명을 포함해 모두 13명이 숨지고 20여명이 다쳤지만 인질들을 구하는 데는 성공한 것이다. 사살된 회교극단주의자들은 같은 달 21일 승객 99명과 승무원 6명을 태우고 마닐라를 떠나 필리핀 남부의 잠부앙가로 비행하던 이 여객기를 납치했다.
필리핀 정부는 회교극단주의자들과 협상을 벌였지만, 제대로 진전되지 않자 특수부대원들을 전격 투입, 무력 진압을 벌였다.
1951년 티베트 평화해방의 방법에 관한 협의 조인
1951년 5월23일 티베트와 중국 대표가 ‘티베트 평화해방의 방법에 관한 협의(17조 협약)에 조인했다. 1950년 12월 수만 명의 중국 인민해방군이 티베트의 수도 라사에 진주하기 시작한 지 6개월 만이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티베트 진주를 보장한 이 협약으로 티베트는 자주성을 잃고 중국의 자치구로 전락했다.
이 협약에서는 티베트의 자치도 약속했지만 대규모 인민해방군의 티베트 진주로 자치의 의미를 크게 제약했고 장기적으로 인민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여러 사람이 죽고 티베트 불교사찰과 유적지들도 훼손됐다. 1959년 달라이 라마의 해외망명으로 이어진 조치였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
완전히 확인되지 않은 사건 아닌가요? 노무현대통령의 자실사건은? ^^
최종환 님 : 사실보도 된 기사들을 근거로 작성된 것입니다. 사실과 진실의 간극은 저널리스트들에게 영원한 숙제이지요. 의미 있는 지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