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바로 알기] 진시황의 병마용과 만리장성

병마용

[아시아엔=심형철 <아시아엔> 칼럼니스트, <지금은 베트남을 읽을 시간> 저자 외] 중국인들은 진시황을 보통 스황띠(始皇帝, 시황제)라고 부른다. ‘황제’라는 칭호를 시작했다는 의미다. 황제라는 말은 ‘삼황오제(三皇五帝)’라는 중국 역사전설 속에 등장하는 위대한 지도자를 뜻하는 말에서 따왔다.

그 중에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요순시대의 ‘요’와 ‘순’ 같은 지도자들이 있다. 하지만 진시황은 황제가 된 이후 삼황오제 시대와 같은 태평성대를 이루지는 못하였다. 자신의 권력을 오래 지속하고자, 혹은 죽음이 너무 두려워서 불로초를 찾다가 죽어버린 평범한 인간이었다.

시황제는 전국시대 진(秦)의 왕족 자초(子楚)의 아들로 이름은 영정(?政)이다. 아버지가 조(趙)나라의 인질로 잡혀 있었다고 하니 권력을 잃은 왕족의 후예였던 셈이다. 그런데 위(衛)나라 출신 상인 여불위(呂不韋)의 책략 덕분에 아버지가 진(秦)의 왕이 되었고, 3년 뒤 아버지가 죽자 영정은 왕위에 올랐다. 영정 나이가 고작 13살 때다.

왕이 된 영정은 나이도 어리고 다른 사람의 힘으로 왕이 되었기 때문에 여불위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모친인 태후와 여불위가 애인관계였다는 소문도 파다하였다. 게다가 태후에게는 노애(??)라는 또 한명의 애인이 있었다.

태후와 노애는 영정 몰래 아들을 둘이나 낳았고 노애는 자기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지만 실패하였다. 영정은 노애를 죽이고 어머니를 유배 보낸 후 여불위까지 나라에서 추방하였다. 쫓겨난 여불위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영정은 실질적인 권력자가 되기까지 험난한 행로를 걸어야 했다. 어머니가 자신을 배신하였고 그로 인해 여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였으니 말이다.

진시황

시황제는 B.C 230년 한(韓)을 멸망시킨 뒤 10년간 위(魏)·초(楚)·연(燕)·조(趙)·제(齊)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대륙을 통일한다. 스스로를 황제라고 부를 만큼 대단한 업적이다. 시황제는 황제라는 권력을 이용해 만리장성을 쌓고 아방궁을 짓는 한편 자신의 무덤을 미리 만들었다. 아방궁은 시황제가 짓던 궁전인데, 진나라 멸망 때 소실되었다.

수많은 병사와 군마의 인형으로 유명한 병마용갱은 현재 중국 시안에 있다. 그의 무덤은 도굴을 막기 위해 엄청난 미로와 함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게다가 무덤을 만든 인부들도 같이 매장해 버렸다고 한다. 2천년 넘도록 발견되지 않다가 1932년 일을 하던 농부가 무덤 주변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병사 인형을 우연히 발견했다.

이후 4개의 인형이 추가로 발견된 뒤 특별한 진전이 없다가 1973년 우물을 파던 농부가 우연히 병사 인형의 머리를 발견한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유물이 주변에서 발굴되었다. 최초 발견자인 농부 양즈파(?志?)는 그 공을 인정받아 시황제릉 명예박물관장으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원래 병마용은 빨간색, 초록색 등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색은 산화되고 황토만 남았다. 중국 정부는 산화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더 이상의 발굴을 하지 않고 있다. 나중에 이 문제가 해결된다면 땅속 깊이 잠자고 있는 수많은 병마용을 화려한 색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시황제는 평생 불로초를 찾을 만큼 죽는 것을 두려워했다. 독성이 강한 수은을 먹으면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약으로 복용했다고 한다. 그때는 수은의 해로운 점을 몰라 먹었겠지만 오히려 수은 때문에 일찍 죽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전한 시대 역사가 사마천이 쓴 <사기>에는 시황제릉이 “수은이 흐르는 수백 개의 강이 큰 바다를 이루고 있다”고 써있다.

만리장성

진시황 때부터 축조되었다는 만리장성은 워낙 유명한 건축물인 까닭에 소문도 많다. 물론 헛소문도 많다. 첫째로 손꼽히는 게, “만리장성은 우주에서 보이는 유일한 인공 건축물이다”라는 말이다. 답부터 공개하면 “안 보인다”이다. 만리장성이 아무리 거대한 건축물이라고 해도 달에서 보이지는 않는다고 한다. 이 말은 미국의 로버트 리플리라는 사람이 1932년 주장한 것인데, 공허한 것으로 결론 났다.

만리장성이 아무리 길어도 폭이 넓지 않기 때문에 멀리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둘째 “만리장성은 진시황 때 다 지은 것”이라는 얘기인데, 결코 아니다. 진시황 이전에 있었던 각종 성벽을 하나로 이은 작업이 진시황 때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명나라 때까지 계속해서 개·증축을 하였다.

마지막으로 “不到?城非好?(만리장성에 오르지 않으면 사내가 아니다)”라는 말에 관한 소문이다. 이 말은 마오쩌둥이 지은 사(?, 중국전통 운문 형식 중 하나)에 등장하는 구절인데, 마치 “남자라면 만리장성을 꼭 가보아야 한다”는 뜻으로 관광 홍보 문구처럼 쓰인다. 하지만 정작 마오쩌둥은 그런 의미로 지은 것이 아니다. 전문은 아래와 같다.

天高云淡 望?南?雁。
하늘 높고 구름 맑은데, 멀리 보니 기러기는 남쪽으로 가네
不到?城非好?,屈指行程二万。
장성에 이르지 않으면 사내가 아니니, 지나온 길 헤아리니 2만리로다.
六?山上高峰,?旗漫卷西?。
류판산 높은 봉우리 붉은 기는 서풍에 펄럭이고
今日??在手,何??住???
오늘은 긴 끈 손에 쥐고 있으니, 어느 때에 흉악한 악귀를 묶어 꿇리랴?

이 노래는 1935년 홍군의 대장정이 마무리되어 가는 시기에 중국의 상징인 ‘만리장성’, 다시 말해 ‘중국 전역’을 혁명의 붉은 깃발로 뒤덮고 악한 무리를 물리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이는 내용의 시다. 사나이의 끓는 피가 느껴지는 시로 유명하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