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숙 열사 학술세미나] 김충석 전 여수시장 기념사 “지역 항일운동가 발굴, 깊은 자부심”

김충석 민선 3대 5대 여수시장

[아시아엔=김충석 민선 3기·5기 여수시장] 1960년대 초 동아일보사에서 3·1독립만세운동을 했던 조그마한 읍이나 면에까지 기념탑을 세워준다는 보도를 보았는데 여수는 없어 서운했다.

1978년 여수JC회장을 하면서 조사해봤더니, 민족대표 33인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만 낭독하셨지만, 파고다공원으로 학생과 군중을 동원하는데 앞장섰던 사람은 여수 출신으로 경기중학교에 다니던 김백평 씨와 경성공업학교에 다니던 이형영 씨고, 광주 장날에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왼팔이 닛본도(日本刀)에 잘려나가 땅에 떨어진 왼손에서 태극기를 뽑아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던 수피아여학생 윤형숙은 화양면 창무리 출신이고,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한 학생은 광주고보 5학년 급장으로 돌산 군내리 출신 노병주 씨란 것을 알아낸 뒤에 자존심과 자긍심이 살아났고, 청년회의소에서 추석에 쌀 한 가마씩을 드렸다.

민선 3기 2003년 7월 29일, 독립운동가 윤자환 씨의 손자이며, 윤형숙 열사의 조카로, 나와 여수서중과 수고 동기생인 윤치홍과, 몇 년 만에 안주섭 보훈처장을 찾아가서 만났다. “처장님,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증거물들은 압수당했고, 본인의 능력으로 신청할 수 있는 분들은 이미 다 했을 것인데, 후손들은 입증자료나 절차를 몰라 신청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여수지역의 독립운동가를 여수시청에서 발굴하여 서훈신청을 하면, 본인이나 가족들이 한 것처럼 처리해주시라고 처장님을 뵈러 왔습니다.” 하였더니, 처장님께서 “지자체에서 처음으로 관심을 가져주신 시장님이 계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자료제공 등 편리를 봐 드리고, 여수시에서 신청해주시면 본인이나 유가족이 신청한 것과 똑같이 취급해드리겠습니다.” 하시어, 여수시가 항일독립운동가를 발굴하여 신청하는 최초의 지방자치단체가 되었다.

윤치홍 씨를 ‘여수시독립유공자 발굴위원’으로 위촉하여, 민선 3기에만 30명을 발굴하여 14명이 서훈을 받았다.

‘남도의 유관순’ ‘여수의 큰 인물’ 윤형숙

윤형숙 열사는 해방 후 여수교회에서 간증하면서 “?전략- 왼팔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고, 땅에 떨어진 왼팔에서 태극기를 뺏어 들고 만세를 부르다 혼절하였는데, 헌병들이 끌고 가서 2년 동안이나 혼자서 온갖 수모를 당하고 풀려났으나, 계속해서 나를 감시하여 창살 없는 감옥에서 살다가 왜놈들이 천벌을 받아 망하고 해방이 되었다. -후략-” 라고 증언하셨다.

예수를 전도하고 봉산학원에서 학생들도 가르치셨다. 1950년 6·25사변이 일어나자 남면 금오도 심포부락 명씨댁으로 피난 갔으나, 예수쟁이라고 인민군에 체포되어 여수경찰서유치장에 감금되었다가,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던 날밤에 인민군들이 후퇴하면서 둔덕동 과수원에서 총살하여 손양원 목사님과 함께 순국하셨다.

여수시에서 발굴한 다른 분들과 함께 독립유공자 신청을 하였으나, 재판기록에 이름이 윤혈녀로 되어있고, 주소도 화양면이 아니고 광주로 되어있고, 윤혈녀를 비롯한 수피아 여학생들은 징역 4개월만 산 것으로 되어있어, 동일인이 아니라고 하여, 백방으로 알아봤더니 전주한예정여학교에 다닐 때 윤 선생님이 사감으로 계셨고, 해방 후에 여수제일교회에서 선생님의 간증을 들었다는 김처녀 할머니(여수부인회 초대회장)를 서울 딸 집에서 만나 영상인터뷰를 하고, 윤 선생님으로부터 배웠던 여수대학교 김충만 전 교수와 화양면 출신으로 어렸을 때 할아버지로부터 윤형숙 열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여수고등학교 재학시절에 전국웅변대회에서 윤 열사를 주제로 웅변을 하여 대통령상을 받았던, 4선 국회의원 신순범 의원을 각각 여수시장실에 모시고 증언을 녹화하였다.

마지막에 내가 종합적으로 ”열혈남아란 말은 있어도 여자 이름에 혈녀(血女)가 있겠냐? 경찰서에서 조사할 때에 윤형숙은 없었지만, 팔이 잘려나가도 만세를 부르던 독한 년이라고 편의상 혈녀라 했을 것이다. 수피아여학교 학적부가 사건 당시 2개 학년 것만 없는 것은 경찰서에서 압수한 뒤에 되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적부에는 분명 윤형숙으로 되어있었을 것이다.

조선총독부에서 일본 총리에 보낸 전문에 ‘광주에서 예수교 신자 1명 부상’이라고 돼 있는데, 그 사람이 누구냐? 윤혈녀만 신분장 지문원지(指紋原紙)가 없다. 출옥기념 사진도 여러 명 가운데 윤형숙만 없다. 이는 윤형숙은 팔이 잘려나갔기 때문에 경찰서로 간 것이 아니라, 일본군 부대로 즉시 끌고 가서 치료를 받고 삼일운동이 잠잠해진 2년 후에 내보내 줬기 때문에, 윤형숙은 자기가 윤혈녀로 재판받은 줄도, 4개월 선고받은 것도 몰랐기 때문에, 2년 징역 산 것으로 교회에서 간증한 것이다.”라는 요지로, 앞서 세분 영상 다음에 나의 종합의견을 실어 보훈처장을 다시 만나서 경과 이야기를 하고 접수한 뒤에, 공적심사위원들에게도 부탁을 드려 건국포장을 받았으나, 유족이 없어 보훈처에 보관 중이다. 민선 5기에 연고자가 없는 분들과 함께 사본을 가져와 여수시청 현관 옆에 전시하였다.

최연소 독립운동가 주재년 발굴 서훈·기념사업

2005년 7월 26일 시민의식이 투철한 서갑식 씨가 시장실로 찾아와서, 소년항일운동가 주재년의 이야기를 하면서 발굴하여 추서해 줄 것을 건의하였다. 처음 듣는 말이어서 깜짝 놀랐고 사실이라면 여수를 빛내줄 자랑스러운 일이어서 흥분되었다. 윤치홍 전문위원이 형사재판 판결문과, 형사사건 기록부를 발급받아 2006년 4월 21일 국가보훈처에 포상 신청을 하고,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주재년 열사 기념사업은 2006년 3월 22일 박준영 지사를 모시고 돌산읍 금성리 559번지로 가서, 생가복원 선양사업을 약속하고 돌아왔으나 더 이상 일 할 수 없었다. 4년이 지나 뜻밖에 민선 5기 시장이 되어, 국가보훈처로부터 8천 200만원을 국비로 지원받고, 시비 1억 400만원도 확보하였으나, 도비(道費)가 확보되지 않아 명시이월(明示移越)하였다. 지사님께 건의하여 2011년에 도비 1억 1천 400만 원을 확보하면서 “초가삼간 복원해 봐야 무슨 의미가 있으며, 누가 해마다 지붕에 날개를 입힐 것입니까? 이 예산으로 기념관을 만듭시다.” 건의하여, 2011년 12월 22일 착공하고, 박람회 개최 기간인 2012년 5월 30일에 박준영 지사님과 내빈, 지역주민들을 모시고 최연소 독립유공자 주재년열사기념관을 준공하고, 옆방에는 돌산 출신 독립유공자 세 분(노병주, 오우홍, 김인식)의 기록도 전시하였다.

여수지역항일운동사 발간

본인들이나 유가족, 보훈처와 여수시에서 발굴하여 서훈 받으신 분들과 서훈을 신청하였으나, 납득할 수 없는 친일 논란과 행적 불분명으로 서훈을 받지 못하신 분들을 망라하여, 김선규(전 여수시장) 여수지역발전협의회 이사장을 위원장으로 하여, 사계의 전문가들과 지역 인사들이 참여하여, 2006년 2월 20일에 총 612쪽 분량의 여수지역항일독립운동사를 편찬하였다.

윤형숙 열사가 일경의 가해로 왼팔을 잃은 순간을 새긴 부조물

여수지역 항일독립운동기념탑 건립

여수지역 항일독립운동가로 서훈을 받으신 40분을, 정부의 예산 지원과 시비를 포함하여, 웅천하나로공원에 여수지역항일운동기념탑과 서훈을 받으신 선열들 한 분 한 분의 공적을 기리는 기념비를 한글과 영어로 기록하여 세우고, 나비처럼 생긴 여수반도의 사람들이 조국광복을 위하여 만세를 부르고 승리의 깃발을 높이 세운 기상을 만천하에 알리는 상징물로 만들겠다며, 전국 공모를 통하여 최우수 작품을 선정하였다. 취지문은 내가 직접 “이 땅에 살던 우리 조상들은 이순신 장군과 함께 물밀 듯 쳐들어오는 왜적을 무찌르고 전라좌수영을 삼도수군통제영으로, 구국의 성지로 우뚝 세우셨습니다. 구한말 조국의 산하를 침탈하는 일제에 맞서 의병이 되신 분, 기미년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서 학생과 시민들을 동원하고 전단지를 나눠 주며 만세를 외치던 학생 대표도, 광주 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왼팔이 잘려나간 여학생도, 광주학생운동을 주도한 광주고보 5학년 급장도, ‘조선일본별국, 일본져라, 조선지광, 조선만세’를 돌에 새긴 열네살 소년도,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사랑의 원자탄을 비롯해 많은 분들이 국권회복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셨습니다. 이분들이 여수사람이라는 데 놀라고 자부심과 긍지를, 한없는 감사와 존경을 표합니다.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를 성공 개최하고, 세계 4대 미항 여수로 우뚝 세운 30만 여수시민들이,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여기 터를 잡아 여수지역항일독립운동기념탑을 세웁니다.”(2014년 3월 1일 여수시장)

특히 돌로 만든 부조(浮彫·돌을 새김)에, 윤형숙 열사의 잘려나간 왼팔과 태극기를 들고 만세시위 장면을 묘사하는 데 신경을 많이 써서 고쳤고, 후에 서훈을 받으실 분들의 자리까지 여유 있게 만들어 두고, 2013년 광복절에 맞추어 기념식과 준공식을 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였으나, 시의회에서 협조를 안 해 주어 어렵게 마련한 국비마저 반납할 위기에 처하였다. 정당한 이유 없이 지연시키므로, 시장 직권으로 예정했던 자리에 터를 닦아, 2014년 삼일절 날 9시 30분에 기공식을 먼저하고, 10시에 전국에서 오신 유가족과 각급 기관 단체장들과 시민, 공무원 등 1천여명이 봄비를 맞으면서 삼일절 기념식을 하였다.

2014년 6.10 만세운동 88주년 기념일에 준공하도록 밤낮으로 독려하여, 102일 만에 유가족과 각급 기관장과 내빈, 시민과 공무원들 1,500여명이 참석하여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준공기념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준공 후에 조경도 하고, 관리동을 지어 독립운동 관련 도서와 자료를 비치하여 전시하고, 찾아오신 분들을 안내하도록 준비하였으나 마무리를 못 했다. 보훈처에서는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만들어진 항일독립운동기념탑 중에, 여수항일독립운동기념탑이 위치나 구성, 내용은 물론이고, 전체 조형물의 예술적 가치가 제일 높다며 극찬하였다고 들었다.

여수시 통합 보훈회관 건립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국가의 부름을 받아 헌신하여 국가유공자로 서훈되신 분들에 대한 예우가, 80년대 이후 국가 경제가 좋아진 후에 일어난 각종 사건들에 대한 보상비에 비교하면 격세지감이어서 안타까웠다. 민선 3기 시장이 되어, 다른 지자체들이 참전수당을 매월 2만원을 줄 때, 3만 원을 드리고, 당일치기 관광을 다니시던 것을 1박 2일로 해드렸다.

6.25 한국전쟁과 월남전 참전용사들을 기념하는, 호국참전유공자기념탑을 자산공원 현충탑 뒤에 있는 동산에 2006년 3월 31일 시비(市費)로 세웠다. 자산공원 현충탑과 진남체육공원 입구 오른쪽 동산에 있는 ‘학도의용군 참전비’의 좌우로, 국방부의 도움을 받아 대공기관포를 설치하여 틀이 잡히고 품위를 당당히 높였다. 민선 5기 시장이 되어, 지자체 중에 참전수당을 유일하게 5만원으로 올렸는데, 광양시가 뒤따라오자, 7만원으로 상향 조정하여 드렸다.

보훈회관을 항일독립기념탑 준공과 함께 웅천택지개발지구 생태터널 큰길 바로 옆의 양지바른, 웅천동 805-3번지 공공업무 6단지 평지 위에, 노병들이 편히 오가시도록 시내버스 정류장도 옮겨놓고, 대지면적 1,650㎡(500평)를 할애(割愛)하여, 건축비만 국비 5억원, 시비 25억 원, 합계 30억 원 예산으로 지상 3층에 연면적 1,800㎡ 규모로 1층은 전시실, 2층은 보훈단체들의 사무실, 3층은 회의실 겸 무료 영화관으로 사용하도록, 어느 기초자치단체보다 더 좋게 지어 흩어져 있는 모든 보훈단체와 참전단체, 항일독립운동유가족과 재향군인회까지 8개 보훈단체가 함께 2014년 10월 1일부터 사용하려고, 여수시 통합보훈회관 설계도 끝내고 예산도 확보하였는데, 그 자리에 있던 고철상이 비켜 주지 않아서 명도소송을 하여 승소하느라, 집을 못 지어드리고 나와서 죄송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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