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대로 알기] 사무라이의 나라···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

일본 사무라이

[아시아엔=심형철 <아시아엔> 자문위원, 오금고 교사] 사무라이(侍) 즉 무사는 일본의 헤이안시대(平安時代, 794~1185) 말에 등장했다. 일본은 덴노(天皇)가 항상 권력을 쥐었던 건 아니다. 헤이안시대 덴노가 집권을 하다가 어머니쪽 친척인 후지와라씨(藤原氏)가 덴노를 대신하여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어린 덴노가 왕위에 오르자 대신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구실로 셋쇼(攝政)라는 직책을 만들어서 대신해서 정무를 보았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성인이 된 덴노를 옆에서 보좌한다는 명목으로 감파쿠(關白)라는 직책을 만들어서 정무를 보았다. 셋쇼와 감파쿠를 합쳐서 셋칸세이지(攝關政治)라고 한다.

이렇게 덴노의 권력을 외가인 후지와라씨가 셋쇼와 감파쿠라는 관직을 이용해 대부분 장악하다 보니 덴노가 중심이 되는 율령체제는 무너졌다. 중앙 권력을 장악하지 못하니 지방 세력이 커지면서 치안도 나빠졌다. 이런 상황에서 영지와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무사들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처음 무사가 된 사람들은 농업에 종사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지방 세력가나 유력 농민 자제였다. 이들은 점차 무예훈련을 통해 전업무사가 되고 무리를 지어 마침내 무사단으로 성장했다. 나중에는 몇개의 무사단을 통솔하는 우두머리도 생겨났다.

세력이 커지면서 귀족 출신 무사도 늘어나고 무사단을 통솔하는 우두머리까지 등장하자 이들은 누군가를 보좌하는 역할에서 벗어나 권력집단으로 변모했다. 헤이안시대 말기 대표적인 무사 가문으로는 헤이시(平氏)와 겐지(源氏)가 있었다. 이들은 더 큰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운명을 건 겐페이전쟁(源平合戰, 1180~1185)을 벌였다. 전쟁에서 겐지 가문이 승리하면서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 1185~1333)가 수립되었다.

막부(바쿠후)란 원래 전쟁을 할 때 “군대 진영 뒤에 막을 치고 지휘하는 곳”을 말한다. 일본에서는 겐페이전쟁에서 겐지 가문을 이끌고 승리를 거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세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거처를 막부라 부르게 된 후 나중에는 무사정권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형식적으로는 덴노가 임명하지만 권력은 세이타이쇼군 줄여서 쇼군(將軍)이 갖고 있었다. 세이타이쇼군이 덴노보다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던 시기이기 때문에 시대를 구분할 때 막부를 뒤에 붙이게 되었다.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 에도 막부 등이다.

가마쿠라시대에 쇼군과 주종관계를 맺은 무사를 고케닌(御家人)이라고 했다. 쇼군은 고케닌에게 영지의 소유를 인정해 주고, 고케닌은 쇼군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전시에는 군역의 의무를 다하는 등 봉건적 주종관계였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권력 차지 후 치안을 유지하고 무신들을 통제할 목적으로 슈고(守護)와 지토(地頭)라는 관직을 두었다. 쇼군에게 충성을 맹세한 힘 있는 고케닌 중 1명을 슈고로 임명했다. 슈고는 주로 치안유지와 무사지휘 역할을 했다. 지토는 주로 세금 걷는 역할을 맡았다. 역시 고케닌 중에서 임명됐다.

가마쿠라 막부도 오래가지는 못 했다. 13세기 후반 2차에 걸쳐 원나라 침입을 받으면서 고케닌들이 군역 의무 때문에 전쟁에 참가했지만, 전쟁을 하면서 든 비용을 막부에서 보조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장에 나가는 것도 힘든 일인데, 돈을 받기는커녕 자기 돈이 더 들었다고 하니 전쟁 후 고케닌들 생활이 궁핍해진 것은 당연지사. 결국 가마쿠라 막부의 권력기반이던 고케닌의 군사력과 경제력이 사라져가자 가마쿠라 막부도 몰락해갔다.

가마쿠라 막부의 세력이 약해지자 기회를 엿보던 고다이고(後醍醐) 덴노가 막부를 타도하고 정치권력을 덴노 중심으로 바꾸려고 했다. 경제를 장악하기 위해 토지소유를 덴노의 명령에 의해서만 인정받을 수 있게 했다. 이에 기존에 토지를 소유한 무사들이 불만을 품게 되었다. 게다가 덴노는 자신의 권한을 과시하기 위해 궁궐을 건축했는데. 비용을 무사와 농민들에게 전가했다. 이때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尊氏)라는 무사가 등장해 무사 세력을 규합해 고다이고 덴노를 유폐하고 자신이 원하는 덴노를 세웠다.

그는 이름뿐인 덴노를 내세워 자신을 세이타이쇼군에 임명하게 한 후 무로마치 지역에 막부(室町幕府, 1336~1573)를 세운다. 무로마치 막부는 내란을 극복하기 위해 슈고의 권한을 강화해줬다. 슈고는 자신의 영지를 늘리고 지토를 관리하면서 힘이 약한 무사들을 부하로 지배하는 슈고다이묘(守護大名)로 성장하게 된다. 이들은 영토를 기반으로 지역 주민들에게 절대 권력을 행사했다.

무로마치 막부는 슈고다이묘 여럿이 모인 연합정권 성격이 강하다 보니 슈고다이묘에게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무로마치 막부 말기에는 쇼군의 후계자 문제와 슈고다이묘들의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내란이 일어났다. 오닌의 난(応仁の乱, 1467~1477)이 그것이다.

오닌의 난 이후 오랜 전쟁으로 무로마치 막부가 있던 교토는 황폐해졌고, 막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슈고다이묘 안에서도 내분이 계속되면서 하극상의 풍조가 만연해졌다. 오닌의 난이 발생한 1467년부터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무로마치 막부가 멸망하는 1573년까지를 일본에서는 센고쿠지다이(戰國時代)라고 부른다.

전국시대에는 전국 각지에서 센고쿠다이묘가 등장했다. 센고쿠다이묘는 슈고다이묘의 전국시대 버전이다. 이들은 중앙정부 간섭을 받지 않고 토지 영유권을 바탕으로 자치를 실시했다. 점차 약소 다이묘들은 몰락하고 각지에서 강력한 센고쿠다이묘들이 등장하면서 전국은 몇몇의 센고쿠다이묘들이 나눠 지배했다.

이때 센고쿠다이묘 사이에서 난세를 통일하려는 야망을 가진 자가 등장한다. 오다 노부나가다. 오다 노부나가가 전국 통일을 눈앞에 두고 부하의 배신으로 죽게 되자, 오다 노부나가 밑에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실권을 장악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지방의 센고쿠다이묘들을 차례로 복속시키고 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이후 무사들의 반란으로 도요토미 정권은 급속히 쇠퇴하고, 그의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최고의 실력자가 되었다.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이타이쇼군에 임명되고 에도 막부(江戸幕府, 1603~1867) 시대가 열린다.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에도 막부가 해체될 때까지 사무라이는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가마쿠라 막부가 열린 1185년부터 에도 막부가 끝나는 1867년까지 약 700년 동안 무사들이 지배한 셈이다.

전국시대의 대표적인 장군인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 3명의 성격을 빗댄 두견새 이야기가 있다. 두견새의 노랫소리를 듣고 싶은데 두견새는 울 생각을 안한다. 이들은 어떻게 했을까?

오다 노부나가는 노래하지 않는 두견새는 바로 죽이고 새 두견새를 가져오라고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두견새를 노래하게 만든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두견새가 스스로 울 때까지 기다려 마침내 두견새 아름다운 노래를 들었다고 한다. 결국 천하 패권을 장악하여 세이타이쇼군에 오른 사람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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