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씨, 조금 긴 자성의 시간 갖고 나서길 바랍니다”···신평 변호사 페이스북에
다음 글은 신평 변호사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아시아엔>은 생각이 같건 다르건 모든이의 의견을 존중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다만 사실을 왜곡·조작한 가짜뉴스나 남을 비방·폄훼하기 위해 쓴 글은 배제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격려와 질책 바랍니다. <편집자>
[내가 조국 씨에 관한 글을 쓴 이유]
옛날 일이다. 1914년생인 아버지와 1919년생인 어머니가 1935년에 결혼했다. 잔반(殘班)집안인데다 위로 조부님이 돌아가신 후 백부 세 분이 모든 재산을 상속받았기 때문에 아버지에게는 송곳 꼽을 땅 한 치 없었다. 신혼 초야를 보낸 열여섯 새색시가 새벽에 밥을 지으려고 하는데, 솥이 깨진 것이었다. 남의 땅 소작을 하며 억척스레 일했다. 밤에는 어머니는 무학인 아버지를 가르치셨다. 아이들은 자꾸만 태어났다. 십남매의 끄트머리로 내가 태어났다.
나는 부모님의 결혼시점을 내 인생의 출발점으로 여긴다. 그 시점에서 부모님이 가졌던, 세상에 대한 한없는불안과 공포감을 내 것으로 간직한다. 그것은 “대학생 친구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하고 탄식하던 전태일 청년의 것이기도 하다.
머리 하나는 좋았다. 초등학생 때 벌써 단테의 신곡을 읽었고,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었으며, 칼 맑스와 엥겔스에 관한 책도 읽었다. 나중에 경북고가 낳은 3대 천재 중 하나라는 말은 자주 들었고, 서울법대가 낳은 3대천재라는 말을 듣고는 실소했다. 일본 유학 중 게이오 대학 교수들이 나를 부를 때는 꼭 ‘텐사이(天才) 신상(申樣)’이라고 불렀다. 내가 무슨 열등의식에서 그 글을 쓴 것처럼 말도 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이런 궁색한 말까지 한다.
그러나 서울법대에 들어가서는 내 인생은 먹구름이 꽉 끼었다. 어린 나는 법이나 법학이 기득권자들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한 정교한 장치 외의 그 무엇도 아니라는 선입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지독한 선입견은 내 인생의 출발과 관련된 것이었다. 막걸리를 듬뿍 마시고 몽롱한 상태가 되어야 겨우 법서를 읽을 수 있었다.
그럭저럭 시험에도 합격하고, 법관으로 발령받았다. 첫 명절이 되어 봉투를 돌리러 온 백발의 지방변호사회장이 내미는 봉투를 사양했다. 그 분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나는 당황하며 그것을 다시 받았다. 세월이 흘렀다. 명절이 되었는데 봉투를 갖고 오지 않는 변호사들 몇을 머리에 떠올리며 괘씸하다고 생각했다. 그 다음 순간 내가 이렇게도 변했구나 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판사실에서 봉투가 오가는 현실을 폭로했다. 판사재임명절차에서 탈락했다. 가만히 있으면 출세를 하거나, 변호사를 하더라도 전관예우를 받으며 몇 십억 원의 돈이 보장되는 자리를 박찬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돈키호테라고 자주 부르지만 사실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나는 젊은 내 부모님이나 전태일 청년과 같은 이 땅의 수많은 겁먹은 민중들을 다시 돌아보는 자세를 갖춘 것이다.
결과는 혹독했다. 단순히 판사직에서 쫓아낸 것만이 아니다. 대법원에서는 내 사생활에 관한 흑색선전을 무차별적으로 뿌렸다. 나는 불행하게도 전혼에서 가족을 형성하지 못하고, 심한 우울증에 빠져 죽는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은인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났으나, 그들은 내가 전혼 중에 바람을 피워 지금의 처를 만난 것이라고 거짓말을 꾸몄다. 이 흑색선전은 몇 십 년을 살아남아 지금까지 나와 내 가족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짧은 변호사생활을 거친 뒤 대학에 들어갔다. 20년이 넘는 기간 교수로 재직했다. 로스쿨 교수가 되었다. 남들은 좋은 곳으로만 골라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기실 로스쿨 제도의 시행으로 로스쿨 교수의 사회적 지위와 법조인의 그것은 역전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내 눈에 비친 로스쿨 제도는 우리 사회의 가진 자, 기득권자의 이익에 편향된 제도였다. 자세한 연구를 했다. 확신이 섰다. 책으로 출판했다. 엄청난 역풍이 불었다. 여기저기서 마구 내지르는 주먹과 발길질에 맞았다. 만신창이로 피투성이가 되었다. 겨우 수습하여 2018년 8월에 명예퇴직을 했다.
그들이 나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나를 사시존치론자로 모는 것이 편했다. 그러나 나는 로스쿨제도를 비판하고 그 개선을 꾀하며, 나아가서 우리나라에 맞는 새로운 법조양성제도를 모색했을 뿐이다.
내 삶에 일관한 것은 바로 과민한 평등감수성이었다. 이것을 건드릴 때 나는 참지 않았다. 젊은 내 부모님을 생각하며, 전태일과 조영래를 생각하며 결연코 맞섰다.
조국 씨를 둘러싼 의혹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웅동학원을 둘러싼 재산의 형성과 유지, 둘째는 제수의 이혼과 집안 재산의 얽힘, 셋째 아이의 진학이다.
조국 씨는 아이가 부정입학했다는 것은 가짜뉴스라고 한다. 그런데 그 아이는 시험 한 번 치르지 않고 대학교, 의전원에 합격했다. ‘합리적 추정’에 의하면, 그 아이가 고등학생 때 말도 안 되는 논문의 제1저자로 등재된 사실이 대학, 의전원 합격에 기여하였다. 조국 씨는 이를 문제 삼는 측에서 입증하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 소극적 사실의 입증은 불가능하다. 살아있는 시퍼런 권력 앞에서 대개 침묵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합리적 추정’이 번복되는 것이 아니고, 또 이런 추정이 작용하는 경우에는 그 추정을 번복하려는 측에서 입증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생과 제수의 이혼이 위장위혼임을 인정하는 증거는 넘친다. 이 증거들을 꿰면 역시 ‘합리적 추정’에 의해 위장이혼은 입증되었다고 함이 상식이다. 그럼에도 이것이 가짜뉴스라고 하며, 다른 입증을 요구한다. 결국 두 사람의 내심을 입증하라고 하는 것인데, 이 역시 불가능하다.
끝으로 조국 씨의 재산형성을 세밀히 추적하면, 왜 조국 씨에게 재산이 집중되고 채무가 면제되며, 다른 가족들은 다른 식으로 재산형성을 다시 할 수 있게 된 경위에 관하여 밝힐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증거도 있지 않은 상태에서 혐의만으로 살아있는 권력의 내밀한 부분을 누가 건드릴 수 있는가! 한국적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조국 씨의 삶은 공적인 영역에서 한 걸음만 더 들어가면, 기득권 유지와 옹호에 철저한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그와 같은 진보귀족들이 한국의 다른 한 면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 역시 기득권자들이다. 물론 상대적으로 조금 낫다. 그럼에도 양쪽은 모두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다. 그것이 내 눈에 비친 한국의 해방 후 지금까지 이어져온 실상이고, 또 이렇게 기득권자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프레임으로 한국사회를 내다보면 보다 더 잘 보인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그런 세상에서 내 젊은 부모님이나 전태일 청년과 같은 사람들은 설 땅이 없다.
그 힘없는 사람들에게도 설 땅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그것은 내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다. 그래서 법관직을 포기했고, 가혹한 흑색선전을 견뎠으며, 또 로스쿨제도를 비판했던 것이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촛불시민혁명이 결실을 맺도록 진력했고, 지난 대선 때는 중앙선대위에서 위원장 하나 맡기도 했다. 그러니 이 정부에 아주 작은 지분 정도는 갖고 있다. 그런 입장에서, 조국 씨와 같이 아직까지는 외면만 번드레한 인물보다는 진정으로 국민들을 위하는 사람이 나서서 이 정부가 성공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염원으로 그 글을 썼다. 그리고 여권이 조국 씨가 안고 있는 문제를 경시하면 결코 그 끝이 좋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을 하며, 이를 하루 빨리 정리하라는 조언을 하고 싶었다. 또 이 글에서 나타난 조국 씨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그가 한국 정치사에서 그 누구 못지않게 뛰어난 자질을 가졌음을 솔직히 인정한다. 다만 지금은 그가 나설 때가 아닌 것 같다는 확신을 가진다. 그는 조금 긴 자성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